♠ 늦가을 은행잎

어느덧 사라져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가을이 오늘 다시 온 천하에 내렸다. 갑자기 찾아온 지진으로 생의 터전이 흔들리는 포항 사람들에게도 다행한 일이다. 기온이 부드러운 동안 포근한 가을 햇살처럼 가족끼리 주거지 안정으로 사랑나누고 정부의 지원도 따뜻이 폭넓게 내렸으면 한다. 시절이 11월 중반을 넘어서니 거의 열흘간 찬바람이 불고 나무들마다 곱게 물든 단풍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건만 아침 출근길에 며칠이나 마음이 아팠다. 시멘트 바닥위에 떨어져 갈 곳 모르는 아침 찬 이슬에 젖은 노란 은행잎 때문이었다.

가을이 끝나가고 있었다.
노란 은행잎이 이슬눈물 달고
아래로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부드러운 흙 곁으로 가야하는데
땅속으로 들어가
엄마나무 뿌리에게 다시 거름이라도

흙으로 가는 길 한 구멍
보이지 않는
시멘트 반들반들 포장도로에 떨어져
그토록 절망어린 노오란 얼굴

지나다 설핏설핏 지켜본 사람들
속 깊은 눈물 찬 이슬방울에 떨구는
또 한 번 늦가을 아침.

- 이슬눈물 전문 -

이 시를 짓고 마침표를 찍으며 울었다. 은행나무도 울었다.

♠ 가을 손님 제자

새벽에 일어나 옥상으로 올라가보았다. 밭에서 캐온 땅콩알이 궁금하여 살펴보고 겉에 묻은 흙을 털고 씻어 소쿠리에 담아 놓았다. 해님을 기다리다 위를 올려다 보았다. 새벽하늘은 전반적으로 옅은 옥색이었고 구름이 곱게 펼쳐져 신비로웠다. 새벽에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모습은 처음이라 눈을 뗄 수 없었다. 막 동터오는 햇살이 연하게 겹쳐서인지 파란하늘에 하얀 구름이 걸쳐 깊은 호수가 하늘에 담겨있는 형세이다.
 
아니 저 깊고 넓은 호수가 하늘에도 있다니 늘 노을 진 붉은 하늘만 보다 진정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얀 달님도 호수 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숨을 죽인다. 마침 개미 만하게 어디론가 떠나는 비행기도 보였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

40년 전 대학시절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거닐던 미호천에서 한 번 보았던 그 하늘 모습이다. 청주에서 교원대를 지나 긴 다리를 건너며 미호천을 생각한다. 넓은 강가 모래밭에 미루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와 맞닿으려는 먼 하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 시절 동기들도 어느 새 회갑을 맞아 어렴풋 미호천 강가를 잊어가고 있으련만 나는 그 미호천을 스쳐지나 오송역 화려한 불빛을 쏘아보며 조치원으로 향해 가고 있다.

교사시절 마지막으로 담임한 제자가 11년 만에 연락을 해와 바로 만나자고 내가 약속을 잡은 것이다.
“선생님! 저 @@인데 혹시 기억나셔요?”
장난기 많고 눈이 큰 귀여운 꼬마소년.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난 그 소년을 바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마 아버지의 불장난으로 어린 엄마가 낳고 가버려 조부모 밑에서 자라다 학교에 입학하여 어려움이 많았었다. 전화로 대략 알아보니 중학교를 졸업하고 작년에 검정고시를 보아 고교 학력을 인정받고 지금 큰 마트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소년이 1학년 때 담임인 나를 기억하고 연락을 주니 그저 고맙고 반갑고 보고 싶어서 조치원 역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늘 그리던 미호천을 다시 건너는 것이다.

역 앞에서 만난 제자는 장난기가 사라진 의젓한 얼굴로 잘 자라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그가 일하는 대형 마트로 가서 사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건강 등 여러 것을 살펴보았다. 고난에 굴하지 않고 외로움을 이겨내 사랑을 건네 온 마지막 제자가 대견할 뿐이다.

아침 새벽하늘에 펼쳐진 호수, 늘 그리운 미호천 그리고 나의 어린 제자는 가을이 건네 준 뜨거운 선물이다. 어쩌면 영원히 만날 수 없었던 한 사람 그 제자가 찾아와 나의 삶은 다시 시작이다. 제자여 군대 잘 다녀오고 씩씩하게 살아가자. 어린 소년은 내가 그를 사랑했다고 믿고 있다. 우리 다시 만났다.

♠아주 추운 겨울이 불쑥 다가오기 전에 미호천에 다시 가보아야겠다. 추억어린 미루나무를 다시 찾으러, 그리고 제자를 만나러 긴 다리를 건너가야겠다.

‘어린 제자여!
앞으로 다시는 시멘트 길 위에 떨어진 갈 곳 없는 은행잎이 아니라 포근한 땅위에 내려앉아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는 꿈을 안고 살아갈 것’ 이라는 하늘의 이야기를 전하고 와야겠다. 천사의 따듯한 노래인양 하얀 첫눈 온 누리에 내리기 전에.

박 종 순 / 복대초 교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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