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자녀와 함께 읽는 생각하는 독서

 “이지러지기는 했으나, 보름을 가제(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메밀꽃 필 무렵’ (다림출판사) 중에서 >

한국 소설 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효석 작가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장돌뱅이 허 생원이 친구 조 선달과, 봉평에서 만난 장돌뱅이 총각 동이와 함께 다음 대화 장으로 넘어가기 위해 고요한 밤 메밀꽃이 하얗게 핀 메밀밭 오솔길을 걷고 있는 장면이다. ‘메밀꽃 필 무렵’중에서도 서정성이 가장 돋보이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메밀밭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듯한 섬세한 묘사가 극치를 이루면서, 마치 소설을 읽는 사람도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 허 생원 일행과 함께 메밀밭 오솔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흐드러지게 밝은 달밤, 대화 장으로 가는 봉평의 메밀밭 풍경은 허 생원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 밤의 경치와 꼭 같은 날 밤, 물레방앗간에서 우연히 만나 하룻밤 사랑을 나눈 성 서방네 처녀를 잊지 못하고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 후론 성 서방네가 봉평을 떠나 더 이상 만날 순 없었지만, 허 생원은 봉평이 마음에 들어 봉평장만은 꼬박 반평생을 다니게 된 것이다.

아직도 옛 처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허 생원, 그는 동이와 밤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혹시 동이가 자신의 아들은 아닐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동이는, 어머니가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은 아들을 아버지 없이 낳아 집에서 쫓겨났고, 그래서 자신은 아버지의 얼굴도 본 적이 없으며, 어머니의 친정은 봉평이라고 한 것이 이를 조심스럽게 뒷받침해준다. 게다가 동이 역시 허 생원처럼 왼손잡이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허 생원은 내일 대화장을 보고는 제천으로 간다며 동이에게 “오래간만에 가 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라고 묻는다. 제천은 동이의 어머니가 의부와 갈라져 현재 살고 있는 곳이며 동이는 어머니도 자신의 아비를 늘 한 번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했다. 이 소설이 더욱 아쉽고 애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러한 열린 결말 때문일 지도 모른다. 작가는 확실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고, 동이가 허 생원의 아들로 추측되는 암시와 여운을 남기며 소설을 마무리 지었다. 결국 독자들의 상상력에 결말을 맡긴 셈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공간적 배경인 봉평은 작가 이효석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1907년 봉평에서 태어나 1942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기까지 ‘메밀꽃 필 무렵’(1936)을 비롯해 많은 서정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이효석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축제인 ‘평창효석문화제’가 9월 2일 개막되어 오는 10일까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효석문화마을 일원에서 열린다고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메밀밭 정취도 느껴보고, 이효석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뜻 깊은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연 인 형 / 국어·논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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