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등을 비춰 봤더니 한 마리도 없다. 그 새 달아난 것 같지는 않고 깜깜한 새벽, 얼떨떨한 기분으로 서 있는데 갑자기 뚝 그쳐버리는 귀뚜라미들 합창.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어딘가에 진을 치고 있던 것일까.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뒤뜰에 나와서 탐색 중이었으나 더는 행방을 종잡을 수가 없다. 허구한 날 그리 신나게 노래했다면 흔적이라도 있을 법하련만 조약돌 몇 개뿐이라니……

하릴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빗나간 상상이 아쉽기만 한데 다시금 어우러지는 중창단 소리. 밤중이고 새벽이고 언제나 저런 식이었었지. 음악에는 문외한일 것 같은 풀벌레의 실내악 콘서트. 듣기 싫어도 창문으로 새 들어 오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어느 날은 잠결에 듣기도 했다. 하루라도 부르지 않으면 목에 가시가 돋는 녀석들. 잠도 안 자고 도대체 뭐하는 짓거리냐고 발끈하다가도 경쾌한 리듬에 빠지다 보면 괘씸한 마음은 금방 달아난다. 새벽이면 더러 가 버리는 듯 볼륨은 작아지지만 어느 날은 동이 틀 때까지도 이어진다.

생각하니 날마다 음악회가 벌써 스무 날이 넘었다. 몇 마리나 되는지 어디서 어떻게 연습을 하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금방 가을이 되고 점점 더 구성진 소리. 비가 쏟아질 때는 기척이 없다가 갠 뒤에 보면 다시 또 이어진다. 듣기 좋은 타령도 세 번이면 싫증나는데 녀석들 노래는 들을수록 신난다. 창밖의 무반주 소나타는 초가을 참새방앗간이었을까. 보이지는 않아도 낮은 음으로 받쳐주는 알토 소리가 있고 멜로디 부분인 소프라노 파트 역시 확연히 들린다. 말하자면 2부로 구성된 전형적인 합창곡. 그렇게 어우러지다가 돌연 한 마리가 구사하는 것 같이 멋들어지게 올라가던 소프라노 음音.

맨 처음 음악적 소양이 뛰어난 녀석 하나가 앙상블 단원을 모집했을 것이다. 다음에는 또 파트별 구성으로 이어지겠지.“너는 목소리가 예쁘니까 소프라노 그리고 약간 바이올렛 톤 목소리의 주인공 너는 분위기 좋은 알토에 들어가면 어울리겠어” 라는 식으로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을 테지. 연습할 동안도 시시콜콜 잔소리는 많았을 것이다. 원래 자기는 서툴러도 듣는 건 민감해서 조금만 어긋나도 대부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악상이 맞지 않는 노래보다 짜증스러운 건 없다는 의미. 귀뚜라미 또한 예외는 아닐 테고 무리 중에서도 특별히 가려 뽑은 녀석들이라면 얼마나 민감한지 알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늘이 높아지는 초가을 연주회나 콘서트를 열기에 좋은 날을 어찌 알맞추 정했겠는가. 그렇게 서로 비평하면서 깜짝 콘서트를 준비해 왔을 테니 생각만 해도 깨가 쏟아지는 느낌. 이제는 누가 들어도“어쭈? 제법인데”라는 탄성이 나오는 건 그 즈음이었을 터. 그 때는 모모라 하는 가을 음악회도 자주 열렸으나 귀뚜라미의 소규모 중창 실력도 충분히 들을만했다. 소질도 있고 매일 밤 거르지 않고 연습한 결과다. 맞춰 보지 않으면 파트별 합창은 아무래도 구사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골방이라서 더 잘 들리는 것도 행운이다. 낮에도 불을 켜야 될 만치 어둡고 눅눅한데 다른 데서는 들을 수 없으니 가을에는 그야말로 축복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또 그렇게 시기를 정확히 포착하는지 신비스러울 정도다. 8월도 중순께가 되면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지는데 용케도 더위가 꺾이는 그 즈음부터 파발을 띄운다. 당초에는 한 마리가 시작하는 듯 쯔쯔쯔 몇 번 그러다가 제풀에 그만두곤 하더니 지금은 수 십 마리가 모여든 낌새다. 사나흘은 망설이는 듯 자분자분한 소리였었지. 한 두 마리가 물색없이 졸라대는 것처럼 듣기에도 어설픈 노래가 어디 대형 콘서트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만치 멋들어진 화음과 리드미컬 경쾌한 멜로디로 바뀌었다. 밤새 들어도 물리지 않을 만치 수준이 향상되다 보면 하늘은 테너 음색으로 맑고 불현듯 정강이께 차오르던 가을 이미지.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환상의 콘서트는 콘체르트니 앙상블 차원이 아닌 단순히 종족번식을 위한 표현이었단다. 끼가 다분한 녀석들 노래는 날개를 비벼가며 부르는 사랑의 멜로디였던 것. 모종의 신비감은 여지없이 사라졌으나 그래서 더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었다. 유치하기는 해도 사랑을 호소하는 간절한 마음이야말로 멋진 세레나데가 나올 수 있는 최고 배경이었으니까.

기악인지 성악인지도 늘 당혹스러웠다. 날개에서 나오는 소리를 보면 기악이지만 타악기로 보기도 어렵고 건반악기는 더욱 아니다. 제 몸에서 나는 건 성악이되 비벼대는 건 기악도 같다. 녀석들의 합창소리만큼이나 신비스럽고 애매한 부분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마침내는 지치게 되고 미심쩍으나마 성악으로 결정한 뒤 별의별 상상을 다 펼쳐왔는데 ……

곤충들은 대부분 수컷이 예쁘다는데 목소리까지 그런가 보다. 파트별 명칭도 바리톤 베이스 테너로 바꿔야겠지만 떼를 지어 불러대다니 별나다. 세레나데가 연인의 창가에서 부르는 노래라면 섬돌 밑에서 울어대는 건 분위기가 맞지만 독창이 아닌 합창은 어쩐지 생소하다. 별나게 투명했던 소리가 주인공이고, 나머지 바리톤 베이스를 들러리라고 지칭하면 또 몰라도.

보통 친구에게 빼앗길까 봐 쉬쉬하는 법인데 어쩜 그렇게 노골적인지. 암컷 귀뚜라미 역시도 떼로 모여 듣게 되면 한 번쯤은 파트너가 바뀌는 등의 해프닝이 벌어지지 않을까 딴에는 염려스럽다. 세레나데를 부를 상황이라면 얼굴 도장은 이미 찍은 상태다. 아울러 피차 점찍어 둔 대상도 있었을 텐데 개개인 아닌 단체작전으로 나가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속출할 게 걱정이지만 해마다 여전한 걸 보면 별다른 잡음은 없었던 것 같은 느낌.

아무튼 기상천외의 세레나데를 들으면서 구애를 받을 정도면 참 대단한 존재였으나 그렇게까지 해야 반응을 보일 건 또 뭔지 모르겠다. 새침데기처럼 내숭을 떠는 건 얄미웠으나 냉큼 허락했다면 밤새도록 열렬한 세레나데는 나오기 어려웠다. 지금 보는 가을 음악회의 특혜도 가당치 않았으니 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참 다행이다. 제 몸을 비벼가면서 기악의 효과를 내는 세상 드문 구애작전이라 가으내 물리지 않았던 걸까. 희귀하고 멋진 노래다 보니 얼핏 듣기만 하고도 선뜻 허락할 것 같은 귀뚜라미들. 배후를 파헤치려다가 환상은 사라졌어도 그래서 더 잊지 못할 콘서트다.

이 정 희 / 수필가

저작권자 © 충북도정소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