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자녀와 함께 하는 생각하는 독서

“별주부가 갈 곳을 알지 못하여 좌우 산천을 두루 살펴보니 산이 높지는 않으나 밝은 기운이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초목이 무성한 곳에 시내는 잔잔하고 절벽은 곧게 솟아 짐승은 슬피 울고, 기화요초(琪花瑤草. 옥같이 고운 풀에 핀 구슬같이 아름다운 꽃)는 활짝 피어있는 가운데 공작새 봉황새가 넘나들며, 꽃향기가 풍겨 나고, 벌 나비가 희롱하며, 버들 빛이 푸른 가운데 노란 꾀꼬리가 왔다 갔다 하니, 진실로 인간 세상의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고전소설 ‘토끼전’에는 별주부가 처음 본 육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렇게 묘사해 놓고 있다. 완연한 봄, 요즘의 산천초목 풍경이 이와 같지 않나 싶다. 노란 생강나무 꽃이 봄의 시작을 알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다채로운 꽃들이 만발하고 있다.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고, 또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는 꽃들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행복감을 느낀다.

우리 문학작품 속에서도 봄의 향연과 같이 유쾌한 소설이 있다면 김유정 작가의 ‘동백꽃’ ‘봄봄’일 것이다. 사실 요즘 사람들이 이 소설들을 읽어보면 제목에서 기대되는 봄의 따사롭고 포근한 감동이나 낭만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할지도 모른다.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봄처럼, 인생의 봄을 맞는 청춘남녀의 풋풋한 사랑을 담고는 있지만, 이야기 전개 방식이 달콤 살벌하다고나 할까? 김유정 작가 특유의 유쾌한 웃음을 끌어내는 해학적인 표현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소설들은 밋밋했을지도 모른다. 해학적 표현으로 소설을 맛깔스럽게 버무려 놓은 것이 신의 한 수이다.

1930년대 농촌을 배경으로 한 ‘동백꽃’은 땅 주인을 대신하여 소작지를 관리하는 마름집의 딸 점순이와 땅을 얻어 부치는 소작농의 아들 ’나’와의 달콤 살벌한(?) 사랑이야기이다. 점순이는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갓 구워온 따끈한 봄 감자를 건네는 것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감자를 주면서 “느집엔 이거 없지?”라고 말을 잘못하여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러잖아도 저희는 마름이고, 우리는 그 손에서 배재(소작권)를 얻어 땅을 부치므로 일상 굽신거린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소리까지 들으니 ‘나’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게다가 ‘나’는 어리숙하여 점순이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감자를 건넸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결국 ‘나’가 감자를 거절한 것이 화근이 되어 점순이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나’에게 닭싸움으로 분풀이를 한다.

어느 날엔 ‘나’가 나무를 하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점순이가 자기 집 수탉과 ‘나’의 닭을 싸움시켜놓고는 노오란 동백꽃이 소보록하니 깔린 곳에 앉아서 호드기를 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닭을 보고 화가 나서 점순네 수탉을 때려죽이지만, 점순이는 이르지 않겠다며 ‘나’와 함께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오란 동백꽃 속으로 쓰러진다. 봄의 정취가 잘 어우러지는 이 장면은 점순이와 ‘나’와의 갈등이 해소되는 화해의 공간이면서도 인생에서의 봄을 맞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사랑이 시작되는 공간이기도하다. 여기서 동백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붉은 빛깔의 탐스런 동백꽃이 아니라 산수유 꽃과 비슷한 노오란 생강나무 꽃을 말한다. 이 꽃을 김유정 작가의 고향인 강원도에서는 동백꽃이라 부른다고 한다.

‘동백꽃’보다 앞서, 1935년에 발표한 ‘봄봄’에서도 봄날 농촌풍경을 배경으로 성례(결혼)하고 싶은 젊은이의 애타는 마음과 이를 방해하는 장인의 이야기가 해학적으로 펼쳐진다. 이 작품에서도 ‘동백꽃’에서처럼 점순이와 어리숙하고 우직한 ‘나’가 등장한다. 주인공 ‘나’가 자신의 딸과 성례(혼인)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마름 집에서 새경도 받지 못하고 일한 지 3년하고도 꼬박 일곱 달. 하지만 장인 될 사람은 그럴 마음이 없는 듯하다. 왜 성례시켜 주지 않느냐고 따져 물으면 점순이 키가 아직 자라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런데 봄날 ‘나’가 밭일을 하고 있을 때 밥함지를 들고 온 점순이가 아버지에게 얼른 성례시켜달라고 조르라며 은근히 눈치를 주는 것이 아닌가. “봄이 되면 온갖 초목이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한다. 사람도 아마 그런가 보다 하고 며칠 내에 부쩍 (속으로)자란 듯싶은 점순이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나’ 는 점순이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용기를 얻어 성례시켜 달라며 장인의 수염을 낚아채는 등 한바탕 살벌한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내 편을 들어줄 것이라 믿었던 점순이는 정작 장인 편을 든다.

사실 마름인 점순이 아버지가 데릴사위를 핑계로 돈 한 푼 주지 않고 ‘나’를 머슴처럼 부려먹는 것은, 요즘말로 갑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인이 한바탕 싸우고 난 후 ‘나’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다독여주는 것을 보면, 욕심 많고 못되긴 했지만 악한 인물은 아닌 듯하다. 이처럼 김유정 작가는 일제 강점기 가난한 농민들의 애환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현실을 비참하게 그리기보다는, 오히려 토속적인 사투리에 해학적인 표현을 가미해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독특한 소설기법을 구사한다. 1937년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문학사에 빛나는 작품들을 여럿 남긴 천재 작가 김유정.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은 사회현실 문제를 생동하는 봄처럼 유쾌한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았을까?

연인형 / 국어·논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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