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나무 꽃 (출처 : 네이버 이미지)

3월이 과거의 시간 속으로 이미 잠들었다. 웬일인지 서럽지 않다. 나무를 만나 속삭이고 무엇보다 사랑했기에, 등하교길마다 큐피드 화살을 내 심장에 꽂는 홍매화에 반해 시를 썼고, 하늘로 피어오르던 황홀한 꽃잎을 하나 둘 땅으로 내려놓은 자목련에 서늘한 가슴을 쓸어도 보았다. 그런데 가슴 가득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대상은 주목나무이다.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이들을 데려갈까

숲이 영원히 데려가지 않고 사람 숲을 지키도록 하는 나무 바로 주목이다.
주목을 처음 감동으로 만난 것은 벌써 20여 년 전 소백산 국립공원에 갔을 때이다. 다섯 살 난 딸애를 데리고 단양에 사시는 시누님 가족 덕분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비로봉 정상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주목군락지였다, 주목의 크기도 높이가 7m 정도이고 줄기 지름이 45센티가 넘어 줄기가 꼬이고 곁가지는 아래위로 굴곡을 만들어 나무마다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희귀한 주목군락이 천연기념물 244호로 지정된 것은 후에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남편이 몇 년 전 주목을 사와서 검은 색 화분에 심어 담벼락 옆에 놓아두고 큰 관심없이 한여름엔 가끔 물을 준 적이 있다. 얼마 전 살펴보니 키가 꽤 자라고 가지도 벌고 잎도 초록으로 건강해져 제대로 한 나무를 이루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꽃보다 예쁜 바알간 투명한 열매가 서너 개 달려 감동을 얻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주목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화분에서조차 비바람 이겨내며 잘 자라는 나무라는 인정을 하게 되었다.

우리 학교 후문은 정문보다 아이들이 많이 드나들고 대부분의 차량도 후문을 이용한다. 문제는 진입로 경사가 심하고 바로 도로와 인접하여 교통사고 위험이 늘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불현 듯 주목 생각이 났다. 대형 화분에 주목을 심어 배치하여 차량의 진입을 서서히 하고 도로 경계면에도 놓아 안전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3월 입학식날 아이들 이름을 곱게 써서 주목나무 열 그루에 매달아 주었다. 아이들과 학부모님이 매우 좋아하며 주목도 함께 입학한 셈이다.

이렇게 기특한 정도의 주목이 밤낮없이 나의 관심을 완전 사로잡은 것은 4월에 들어서이다. 주목나무 잎 사이로 이상한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작년 가을 주목 화분을 집 앞쪽 출입문 가까이 내놓고 눈이 내려도 들여놓지 않고 차갑게 겨울을 보내게 하였다. 다행히 봄이 되자 잎이 건강하고 초록 새순도 나왔다. 들며날며 잎을 쓰다듬던 어느 날 흠칫 놀라고 말았다. 바늘처럼 뽀족한 잎사이에 흡사 벌레모양 같기도 한 것이 군데군데 붙어 있는 것이다. 병을 얻은 것은 아닐까 조바심 대며 여기저기 조사하니 다름 아닌 주목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힌 것이다. 그 질긴 가지에 뾰족 바늘 잎 사이에 보드란 꽃망울을 조롱조롱 매달다니 기특함을 넘어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주목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꽃망울을 피워낸 것일까? 자식위해 속 끓이고 더 이상 주름질 수 없는 늙은 어미의 심장처럼 희귀한 모양새이다.

아니 왜 60년 동안 아무도 나에게 주목 꽃을 묻지 않고 보여주지도 않았는가? 떨리는 손으로 살짝 꽃망울을 더듬어 본다. 볼수록 기이하고 새롭다. 나는 이들과 늦은 봄을 보내고 소낙비 내리는 여름을 지나고 단풍지는 가을을 맞으며 2017을 살아낼 것이다.
‘내 아직 살아있어 너ㅡ주목꽃을 만났으니 지금 떠나도 좋다. 너는 60년을 기다려 내 가슴 가슴에 핀 꽃이다.’

주목은 끝내 솔방울을 달지 않고 가을이 깊어지면 특별한 모양의 열매를 만들어 내니 더욱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주목이 언제 종모양의 바알간 그 보석을 달려 하는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새롭고 어여쁜 것을 발견하게 되니 제대로 늙어가고 있는 것인가? 60년 만에 처음 만난 주목 꽃망울 덕분에 설렘 가득한 봄을 맞이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이 몰래몰래 깃들어 있기에 인생은 매일 새 것이다.

박 종 순 / 복대초등학교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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