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세상보기 <이터널 선샤인>

지워버려도 흔적은 남는다...

한자의 구조를 살펴보면, 희노애락을 포함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과 관련된 한자에는 대부분 ‘心(마음 심)’ 자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옛날 중국인들은 마음이 가슴부위에 위치한 심장 안에 있다고 여겼고, 그 믿음에 확신을 갖고 심장의 모습을 본 떠 ‘心’ 자를 만들게 된다. 그렇게 상형화된 문자가 갖는 설득력은 사랑을 하면 가슴이 설레고, 슬퍼지면 가슴이 아프고, 흥분하면 가슴이 뛰는 다양한 마음으로부터의 반응을 통해 드러나는데, 그 반응들의 근원이 가슴이라는 점은 ‘心’자의 탄생에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

놀라운 것은 영화 <이터널 션사인>에 등장하는 커플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들을 과학의 힘을 빌어 인위적으로 지워버렸는데도 서로에게 이끌려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데, 문득 ‘心’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시각화 시킨 옛 사람들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려도 마음이 기억한다는 자연스런 원리를 일찌감치 터득했다는 사실이 무척 감동적이다.

기억의 편집...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는 우발적으로 몬탁에 있는 바닷가에 가게 된 조엘이 우연히 클레멘타인을 만나 호감을 갖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그린다. 클레멘타인은 말주변도 없는데다 소심하기까지 한 조엘에게 다소 버겁고 거리감 느껴지는 이성이지만, 외향적이고 거침없이 자유분방한 그녀의 상반된 성향은 색다른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끌림과 탐색전의 시간이 쌓여가면서 두 사람은 서서히 허물없는 사이가 되고, 감정의 지루한 반복과 익숙한 일상이 지속되면서 소원해지고 무미건조해지는 그렇고 그런 관계가 형성된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땐 서로가 다르다는 것이 상대방에게 특별한 매력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와서 그 부분은 갈등의 불씨가 되어버린다. 안타깝게도 섭섭함과 원망의 기운들이 둘 사이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못마땅해 하며 직설적으로 내던진 몇 마디에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린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곁을 떠나버린다. 즉흥적으로 다가왔던 것처럼 돌아설 때도 충동적이고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녀에겐 정리과정도 필요 없고 재고의 여지도 없다. 클레멘타인은 기억의 삭제를 도와주는 전문회사를 찾아가 오랜 시간 조엘과 함께 한 모든 기억들을 지워줄 것을 의뢰한다.

추억의 조각들...

조엘은 발렌타인 데이를 앞두고 화해를 하기위해 그녀를 찾아가지만, 자신을 난생처음 보는 사람 취급하는 그녀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혼란을 겪는다. 그녀가 기억들을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엘 역시 같은 회사를 찾아가 그녀의 선택을 함께 따르기로 결심한다.

가깝고 선명한 기억부터 지워나가는 과정 속에서 관계가 틀어지기 전 서로에게 애틋하던 시절의 기억들이 기억의 회로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고, 추억의 파편들은 눈앞에서 역순으로 희미하게 흔적을 감추기 시작한다.

조엘은 문득 소중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된다. 사라져 가는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아 그녀와 함께 도망 다니다 또 다른 기억의 공간에 숨어들기도 하고, 기억의 공간에 갇힌 채 담당자에게 삭제작업 중단을 요청해보기도 하지만, 수면상태에서 벗어나 현실 밖으로 도망칠 방법이 없다. 그들의 애틋한 과거의 추억들은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라지기 전의 기억이 뒤엉킨 공간 속에서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사랑을 기억하다...

결국 하루밤 사이에 의뢰인의 기억회로는 저장된 정보들을 선별해 걷어내는 편집 작업을 마치게 된다. 다시 이야기는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와 중복되는 장면들을 확인하게 하면서, 조엘이 왜 뜬금없이 몬탁행 열차에 올랐는지 깨닫게 하는 반전의 묘미를 살린다.

모든 상황들이 머릿속에 정리되는 순간, 우리의 가슴은 비장한 준비를 시작한다. 잊혀진 기억과 사라질 기억의 교차점에 서서 깨닫게 되는 뜻깊은 사실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 상처받은 아픈 기억조차도 내 삶의 일부라는 것, 무엇보다도 ‘心’자에 담긴 삶의 철학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는 점이 구태의연한 남녀의 사랑을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하는 강한 에너지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된다.

이종희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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