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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공간
공항 터미널은 명절이나 휴가철이 되면 각종 매체에서 이용객들이 연일 최다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고 보도되는 단골장소이다. 비행기를 탑승하려면 누구나 당연히 통과해야 하는 곳으로 설렘과 막연한 기대감에 들떠 혼잡하고 어수선함 속에서 일종의 판타지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고, 목적이 있는 준비된 자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경유하며 정해진 어딘가를 향해 발을 딛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그곳은, 긴장감과 불안감을 제공하는 낯설고 두려움 가득한 폐쇄적인 공간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추억과 기다림의 여운을 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간직하게 만드는 특별한 감성 공간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영화 <터미널>은 어쩌다가 발이 묶여 터미널이 사적인 생활공간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뉴욕 방문객으로 왔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공항 안의 노숙자 신세로 수개월의 시간을 지내야했던 한 남자를 둘러싼 공간은 미처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씁쓸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 터미널은 주인공의 일상을 통해 활기차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한편으로 억압되고 경직된 분위기가 공존하는 곳으로 그려지는데 우리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좇으며 자연스럽게 그 공간에 호기심을 더하고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남자, 최악의 해프닝
그 남자 빅터 나보스키에게 뜻밖의 불상사가 발생한건 JFK국제공항 입국 심사대 앞에서이다. 뉴욕으로 날아오는 동안 그의 고국인 크라코지아에서 유혈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신분을 보장해 줄 소속국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정부가 발행한 모든 여권이 정지됨에 따라 입국비자도 자연스럽게 취소되어 효력을 상실하고, 고국의 화폐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국경은 폐쇄되고 여행기 운항도 전면 중지된 상태이다. 고국이 안정을 되찾고 외교 관계가 다시 성립되기 전까지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입국할 수도 없다니 사면초가다.

출입국 관리국 담당자들은 유창한 영어로 심각하게 상황설명을 늘어놓지만, 나보스키는 입국을 한 후 호텔을 찾아가기 위해 적어온 몇 마디의 문장을 어설프게 반복하며 동문서답을 늘어놓을 뿐 간단한 의사소통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돌아갈 고국도 없고, 어떤 이유를 적용시켜도 입국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그를 잡아둘 이유도 충분치 않다. 우습게도 결국 그에게 허락된 자유공간은 수많은 이용객들이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장소 인 국제선 환승 라운지였다.

그 남자, 기다림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할 처지라면 처한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해나가며 다음 단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는 터미널 어느 한 구석 빈 공간에 임시 잠자리를 만들고 심지어는 푼돈을 벌 수 있는 방법까지 터득한다. 놀라울 정도의 속도와 명석함으로 영어를 습득하고 매력적인 승무원과 잠시 사랑도 키워나가며 재주와 솜씨를 인정받아 우연히 취직자리까지 얻는다. 승진심사를 앞두고 그의 존재가 골칫덩이일 수밖에 없는 출입국 관리국 대표의 집요한 방해가 있어도 원칙을 어기려 하지 않는 기다림의 일상은 두려울 것도 서두를 것도 아쉬울 것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는 순간적 재치를 발휘해 곤혹을 치르게 된 방문객을 돕는 과정 속에서 공항이 일터인 많은 노동자들에게 존경받는 영웅이 되고 그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지지층까지 형성되어버린다. 그를 통해 순수한 인간애와 감성적인 행위들이 얼마나 진실 되게 다가오고 사랑과 희망을 쫓는 기다림의 미덕이 어떤 에너지를 발휘하는지 느낄 수 있다. 그 순간 우리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그가 준비하던 크래커의 담백함과 맞먹는 감동을 느끼며 다시 한 번 터미널이란 공간을 둘러보게 된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는 소속된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스럽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종희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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