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사랑은 일종의 판타지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시청자들의 몰입을 빈틈없이 주도해 나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기존 멜로물과 차별화된 이야기구조를 꼽을 수 있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대부분의 멜로드라마 속에 단골처럼 등장해 남녀 관계 속에서 구태의연한 걸림돌이 되곤 하던 외부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절감하고, ‘사랑’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 작품 속에서 묻어나는 판타지를 더욱 극대화시키지 않았을까? 흔해 보이고 쉬워 보이지만 진하고 강렬한 잔상을 남기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쉽지 않기에 누가 봐도 황홀경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사랑’ 체험을 일종의 판타지라고 표현한다면, 영화 <그녀(Her)> 는 애정 판타지의 미래버전이라 할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엔 사랑의 대상이 색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는 설정이 무척 흥미롭고, 가슴 뭉클한 감동의 여운을 오랫동안 간직하게 만든다.

그 남자
가까운 미래에 살고 있는 시어도어는 ‘아름다운 손글씨 닷 컴’ 직원이다. 그는 다양한 필체로 애정 어린 메시지를 담은 손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로, 하루에도 몇 통씩 진실어린 마음을 전하는 문장들을 써내려가며 타인들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행복을 전한다. 그렇지만 정작 그를 감싸고 있는 기운은 공허함과 쓸쓸함이다. 별거 중인 아내의 바람대로 이혼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그에게 학창시절부터 이어진 오랜 관계를 정리해나가는 일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타인들의 관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편지글에 적용하는 그의 탁월한 능력들은 아내와의 관계 속에선 그 어떤 답안도 제시하지 못한다.
어느 날 퇴근길에 시어도어는 우연히 최초로 개발된 인공지능 운영체제에 대한 광고를 접하게 되고, 프로그램을 구매하면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 여자
사만다는 프로그램이 지시하는 명령어에 따라 몇 가지 간단한 사항만 입력하고 나면 곧바로 존재를 드러내는 맞춤형 대화상대이다.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가상현실 속에서 목소리를 통해서만 존재를 알리는 인공지능 운영체제로, 어울리는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고 상대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그녀는 프로그램에 접속하는 상대의 취향에 맞춰 완벽한 소통의 파트너가 되어준다. 풍부한 감성은 물론이고 감탄할 만한 지성까지 겸비한 그녀는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진화해 나가는 여러모로 빈틈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시어도어와 깊은 관계가 지속되면서 차원이 다른 공간의 정신세계를 넘나들다가 결국 자신의 정체성 문제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워한다.

사랑에 빠지다
관계의 깊이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과연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가능한 시도일까? 인간과 컴퓨터 운영체제 사이의 특별한 감정, 그 사랑은 과연 진정한 관계였을까, 한 남자의 고독한 감정에 뒤얽힌 허상이었을까?
시어도어는 호기심으로 시작해 그녀에 대해 알게 되고 서서히 깊은 관심 단계로 발전해간다. 공감코드가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관계가 깊어지고, 사만다에게 집착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며 사소한 갈등까지 겪어 나간다.

자아가 확실한 운영체제인 그녀 역시 다양한 감정들을 학습해 나가며 인간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는 기본적인 욕구는 물론 그 이상의 것들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흡수해버린다.
시어도어는 진심으로 그녀와 순수하고 은밀한 사랑에 빠진다. 지금까지 미뤄왔던 아내와의 관계를 마무리할 용기도 얻고, 무력함과 고독감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한 남자가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아픈 상처를 치유해 나가며 삶의 에너지를 다시 얻는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지만, 상대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이다.

게임은 끝났다.
적어도 사만다의 고백에 따른 뜻밖의 반전이 있기 전까지 그들 사랑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시어도어는 그녀가 수천 명과 동시접속을 하며 거리낌 없이 인연을 맺고 관계를 확장시켜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을 포함해 641명과 사랑에 빠졌다는 숨김없는 고백에 말문이 막힌다. 자신만이 소유하고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는 대상이라 여겼던 그녀가 누구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관객들도 함께 그가 느끼는 충격과 혼란을 고스란히 공유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어도어는 그녀의 일방적인 작별 통보에 마치 오랫동안 진지하게 끌어온 컴퓨터 감성 게임에서 빠져나온 듯한 허탈감에 마음이 어지럽다. 진정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지만, 왠지 모를 낯선 감성과 허망한 기운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사랑은 온도가 비슷한 상대와 나눠야 진정성을 더할 것 같은 촌스런 생각에 사만다의 학습되어진 진심을 의심케 한다. 알파고의 등장 이후 새로운 시대의 개막에 대한 수많은 의견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적어도 남녀간의 ‘사랑’만큼은 아날로그 감성과 더 잘 어울리지 싶다.

이종희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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