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아오는 1월 방학을 맞아 한시름 놓으려는데 손아래 두 째 여동생이 놀라움을 던져 주었다. IS 등 세계 곳곳에서 무차별적인 테러가 빈발하는데 10박 11일 해외여행을 감행한 것이다. 모든 가족들이 만류했지만 몇 달 전부터 성당에서 기획한 여행으로 미룰 수가 없고 나름 기대도 큰 형세이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등 예수님 성지순례를 가는 것이라 한편 위안을 삼으면서도 내내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바로 다음날부터 SNS로 여행 일정과 곳곳에 자리한 성당 사진을 보내와 드디어 동생이 우리 곁을 떠나 멀리 가 있다는 실감이 났다. 한편 열흘 이상이나 집을 떠나보낸 제부와 사돈어른이 대단하고 고맙기도 한 것이다.

동생내외는 중학교 1학년 시절 한 반으로 만나 1,2등을 다투면서 서로에게 신뢰를 쌓고 좋은 감정이 일었는지 그 후 10여년이나 청년 시절을 건너오면서도 헤어지지 않았다. 고교 때는 제부는 강원도로 동생은 충북으로 도를 갈라 진학 했지만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얻고 결국 결혼하여 잘 살고 있으니 40여년 동지로서 첫사랑을 살려낸 순애보의 주인공들이다. 제부는 고교시절 방학이 되면 기차역에 나가 아직 멀리 있는 연인의 기차를 가슴 설레며 기다렸고, 그 소년의 모습은 우리 자매들에게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간직한 추억이 되고 있다. 재미있는 일화는 막상 만난 동생에게 무얼해줄까 고심하다 지금은 시모님이 되신 어머니에게 빵을 쪄 달라하여 한 쟁반 가져다주며 동생의 마음을 어떻게든 안으려 애쓴 것이 가슴마저 아리게 한다.

꿈같은 열흘이 지나고 동생이 무사히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카톡으로 일제히 퍼져 나갔다. 아마 제일 기쁜 사람은 제부일 터이다. 나도 동생이 무척 보고 싶고 언젠가는 성지 순례 계획이 있어 미리 이야기도 들을 겸 영월에 살고 있는 동생네 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청주에서 제천을 지나 영월까지 가려면 교통편이 문제인데 청주에 사는 셋째 여동생이 운전을 하여 데리고 가겠노라 맞장구를 보내온다.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 운전에는 트라우마가 있어 걱정인데 동생뿐이다 싶어 마음이 편하고 기쁨이 더 했다. 더욱 복된 것은 제천에 살고 있는 막내 여동생이 바쁜 일 접어두고 합류하여 영월로 세 자매가 향하게 되니 이 세상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었다.

멀리 여러 날 동안 예수님 성지를 다녀온 동생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동생 집은 전원마을 제일 위쪽에 자리하여 한적함이 깃드는데 동생이 그림처럼 기다리고 있다. 헤어모양이 조금 짧게 바뀌고 환한 얼굴이다. 피를 나눈 반가움에 보자마자 전율이 솟는다. 사돈어른이 더욱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신다. 몇 번인가 ‘어머님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불평하던 동생이 결국 전원주택에 까지 모셔와 함께 사니 효부는 분명하다. 준비한 용돈을 드리며 오래 사시라고 꼭 안아드렸는데 이웃집에 만두를 빚으러 가신다 하며 자리를 내어주신다. 동생은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제부의 고향인 영월에 전원주택을 마련하였다. 산과 하늘이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 아직 성지의 거룩함이 깃든 동생의 손을 기꺼이 잡고 머리에 모아 축성을 받는다. 아래 동생들도 차례로 축복을 나누고 내가 점심이라도 사먹이고 싶어 가자하니 송어회를 먹자한다. 깨끗한 못에서 꼬리치던 송어들이 접시에 나란히 누워 마치 진달래꽃처럼 색깔이 곱고 선명하다. 갖은 야채에 비벼먹고 한 두첨 상추에 싸서 먹고 어찌나 맛있던지 주인에게 물어보니 본래 송어는 겨울이 제맛이란다. 어느새 동생이 결재를 해서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무사히 동생이 다녀왔고 모처럼 네 자매 어울리니 막내가 좋은 곳에서 커피향이라도 맡고 가자고 의견을 낸다. 어린 단종이 잠들고 있는 장릉을 지나 동생이 안내한 곳은 동강사진박물관이다. 전시실 옆에 카페테리아가 있다는 것이다. 마침 ‘한국을 바라본 시선’을 테마로 기록사진전이 열리고 있어 동생들은 커피를 즐기고 나는 사진 감상으로 1960년대 내가 자라던 시절을 회상하며 가족과 헤어진 이웃들을 오랜만에 떠올려 보는 시간을 만났다.

처형이 왔다고 일찍 와서 저녁이라도 사겠다는 제부는 밤이 깊어서야 한라봉을 사들고 왔다. 지난해 선거를 치르고 한반도 조합장에 당선된 제부는 아내의 내조 덕이라며 우리들 앞에서 동생에게 입맞춤을 얹는다. 40년을 살았지만 한 번도 소리높여 싸운 적이 없다고 동생이 부끄러움을 감춘다.

이에 뒤질세라 주말이면 거의 영화관이나 바닷가에 가있고 둘이 찍은 다정한 사진을 카톡에 올려 부부금슬의 첨단을 보여주는 막내가
“ 형부 노래 한 곡 불러 보셔요. 언니도 여행 잘 다녀왔는데...”
술 한 잔 들어가면 장난기가 돌고 더 순수해지는 제부 ‘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 꿈처럼 행복했던 사랑이여 머물고 간 바람처럼..’
술김인데도 가사하나 빠트림없이 완창한다. 네 자매의 앙콜 환호와 박수 소리에 베란다까지 다가온 하늘의 별이 빛나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저마다 더욱 깊어간다.

만약 내게 동생들이 없었다면 이런 호사와 즐거움을 어찌 누릴 것인가! 동생들이 소중하고 나보다 앞서가고 새삼 고마움을 느낀 것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번이 처음이다. 몇 번이나 달려드는 병마를 잠재우고 드디어 2016 아흔 고개에 올라선 어머니가 하신 일 중에 가장 잘하신 것은 나에 그치지 않고 동생들을 많이 낳아주신 것이다. 내 위로 외아들이지만 소통과 배려의화신 오라버니를 나으신 것도 두고두고 동생들에게 복이다. 팔남매를 성장시킨 어머니는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다. 삶의 길에서 외롭고 지칠 때도 제일 먼저 찾고 싶은 영혼의 샘, 동생들과 행복하니까 어머니가 그립다.

‘어머니 !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지금 우리는 강원도 멀리 충북에 계시는 어머니께 조용히 되뇌어본다.
동생들이 가는 삶의 길목에 거친 바람이 일지라도 다시 새벽달이 뜨고 별들이 총총 응원할 것을 나는 믿는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생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박종순 / 보은 산외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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