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충북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이라면 단연 국립청주박물관입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망라해 한자리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청주박물관에는 2,3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지만 그 많은 유물 중 국보는 딱 한 점 있습니다. 바로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비상(국보 106호)입니다. 여기서 계유(癸酉)는 연대를 기록한 것으로 673년(문무왕 13년)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1300여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어느 석공이 빚은 불상인 것이지요.

천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품고 있어서일까요. 불비상과 관련돼 전해지는 이야기는 신화나 설화 못지않게 흥미진진합니다. 멸망한 백제와 통일을 목전에 둔 신라의 기세에서 살짝 비껴나 진행된 백제유민들의 염원이 불비상이라는 독특한 부처의 세계를 빚어낸 것입니다.

잊혀진 역사의 단초는 1960년 충남 연기군(세종시) 비암사에서 시작됩니다. 이 절은 산골짜기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조차 드문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소박하기 그지없는 사찰에 국보급 유물이 안치되어 있으리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탁본이 과제였던 한 대학생이 비암사 석탑을 탁본해 제출하면서 궁벽한 절 마당에 있던 불비상은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대웅전에 모셔져 있어야 할 불비상이 어떤 이유로 석탑 위에 올려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연이 빚어낸 필연의 조화였지 않을까요. 이 예사롭지 않은 유물에 주목한 황수영 교수는 이후 연기군 일대에서 모두 7구의 불비상을 찾아냈습니다.

돌비석 형식의 불상이 연기군 일대에서만 발견되면서 멸망의 베일 속에 가려졌던 백제유민들의 정신도 다시 조명되었습니다. 명문에 ‘계유년 4월 15일에 내말 전씨, 달솔 진차원, 진무 대사 목 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과 7세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고 밝혀 죽은 이들을 위한 극락정토왕생의 염원과 나라 잃은 백제인들의 슬픔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살아있는 권력자에게 충을 다해도 죽은 권력자에게 충을 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나라를 잃은 국민들이 죽은 왕을 추모하는 것은 마음 깊이 존경과 그리움이 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들이 한 무리 백제 유민이었을지언정 백제가 결코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천궁녀와 낙화암에 빠져있던 패망의 백제사도 백제를 추앙했던 유민들의 기록을 통해 조금은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입니다.

홀연한 불비상의 등장 못지않게 조각 형식에서 소박한 듯 간결하고, 간결한 듯 화려한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조성시기는 신라지만 불교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통일신라 불상과 비교해 볼 때 모양이나 크기가 확연히 다릅니다.

스스로를 증거하고 있는 유물은 백제 불교 양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비록 크기에서 주변을 압도하지는 않지만 정성을 다한 석공의 손길은 ‘진심’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돌을 비석모양으로 깎아 네 면에 부처의 세계와 명문을 새겨 넣었으며, 높이도 어른의 무릎(높이 43cm, 폭 27.6cm, 두께 17cm) 정도에 불과합니다.

감실 효과를 낸 앞면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보살ㆍ인왕ㆍ여러 천인(天人) 등이 화면 가득 채웠고, 그 아래로 머리를 맞댄 두 사자와 연꽃잎이 장엄을 더해줍니다. 옆면에는 용과 연꽃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을 조각하였고, 뒷면에는 20화불을 조각해 생동감을 줍니다. 어느 하나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자태에서 백제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또 하나의 의문은 충남 연기군에서 출토된 유물이 청주박물관에 소장된 점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공간적 의미를 확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연기군이 고려시대까지 충북에 포괄된 지역임을 고려할 때 이 불비상은 충북의 백제역사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청주 신봉동 백제무덤군과 최근 송정동 일대에서 발굴된 700여기의 백제 집터는 힘이 막강했던 백제의 흔적임을 감안할 때 불비상과의 연관 고리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미호천을 지나 금강으로 흐르는 물줄기처럼 백제역사도 그렇게 굽이쳐 비암사에 닿았던 것은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이제 겨우 몇 개로 드러난 퍼즐 조각으로 충북의 백제역사를 말하기엔 미흡합니다. 그러나 불비상이 펼치고 있는 정토사상처럼 더 큰 모습으로 백제를 그려나가기 위해선 박물관이란 공간 너머, 땅의 기저에 흐르는 시대정신을 작동시켜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연지민 / 충청타임즈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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