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역사

‘만약’이란 전제하에 재구성되는 역사적 사건들은 이해가 쉬운 기본적인 설득력만 바탕이 된다면 흥미를 자극하고 호기심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라는 상상, <순수의 시대>에서 이성계의 충신이자 정도전의 사위 김민재란 존재를 가상의 인물로 등장시켜 피바람 부는 시대 속에 애절한 남녀의 사랑을 그려낸 감성, 그 외에도 다양한 장르 속에서 크고 작게 가감되어지곤 하는 가상의 소재들은 안도할 수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색다른 역사적 체험을 제공하곤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독립에 실패하고 여전히 일본강점기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간다는 가설은, 일본이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개선의 태도를 보여주지 않고, 한일 두 나라가 여전히 첨예한 갈등구조 속에서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지금, 잠시 생각만 스쳐도 개운치 않은, 숨 막히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미수사건...저격수 안중근 현장에서 사살...1919년3월1일 파고다공원 불법집회 무산...1932년 상해 홍구 공원 윤봉길 현장에서 사살......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간략하게 편집한 가상의 자료화면들로 오프닝을 장식하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감정몰입을 이끄는 이유는 여러모로 충분하다.

왜곡된 진실

영화의 중반부에서 주인공인 사카모토가 독립운동 비밀조직인 ‘후레이센진’을 이끄는 최고지도자로부터 전해듣는 이야기는 한층 더 충격적이다. 남북통일을 이룬 대한민국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한중일 공동연구를 진행하게 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영고대’와 ‘월령’이란 유물이 발견된다. 일본 측 연구원은 그것이 시간을 역행하여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의 문과 열쇠 역할을 한다는 비밀을 먼저 밝혀내고, 일본의 극우조직은 비밀리에 100년 전 하얼빈 역으로 자객을 보내 안중근의 거사를 막는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그 시점부터 왜곡된 진실을 되돌리지 못한 채 일본의 그늘아래에서 암울한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련의 판타지를 연상케 하는 이야기는 영화의 오프닝을 위한 설득력 있는 부연으로 영화 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테러사건 해결의 단초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일본제국을 유일한 모국이라 여기는 JBI의 특수수사요원 사카모토가 서서히 의식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의 뇌리 속에 언제나 숨기고 싶은 치부였고,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후레이센진’을 돕다가 동료 경찰의 총에 죽음을 맞이한 부친의 희생이 어긋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의로운 행동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테러진압 당시 자신의 총에 맞아 쓰러진 어느 ‘후레이센진’의 어린 아들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본분을 깨닫는다.

얼룩진 우정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시작부터 사카모토와 사이고 두 남자를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경찰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사이인 그들은 조선인과 일본인, 도망자와 쫓는 자, 왜곡된 역사를 바꿔야 하는 입장과 그것을 지켜야 하는 처지란 대립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으며 더 이상 서로에 대한 우정을 지키지 못한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란 오명과 원자폭탄 투하 사건만큼은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싶은 깊은 상처였다. 사이고 역시 뒤바뀐 역사의 비밀을 전해 듣고, 히로시마가 고향인 처가가 무사해야 자신의 가족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막중한 임무를 떠맡는다. 시간의 문 건너편 과거의 공간인 하얼빈 역을 배경으로 네 명의 남자---안중근 의사/극우조직이 보낸 자객/사카모토/사이고---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이 이어지고, 비장한 분위기는 절정에 달한다.

이제 누구보다도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독립투사 사카모토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시간의 문을 함께 넘어 온 사이고, 애국심과 우정이 뒤얽힌 역사의 현장 속에 울려 퍼진 몇 차례의 총성과 함께 뒤바뀐 역사는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지만, 피와 눈물로 얼룩진 두 남자의 우정은 과거의 아련한 기억 속에 묻혀버려 한동안 마음 한구석을 씁쓸하게 만든다.

모던보이

사카모토는 독립을 다룬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하나의 전형을 착실하게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정시기, 역사적 사건을 배경삼아 다양한 군상들이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담아낸 작품들 속에는 처음부터 적극적인 지도자형, 어떤 계기로 독립군의 대열에 합세하게 되는 반전형, 무늬만 독립군이었다가 결국 등 돌리고 마는 배신자형, 소극적인 방관자형, 관객들의 분노를 가장 많이 자극하는 친일파나 매국노까지, 설득력 있는 다양한 유형들이 등장한다. 그들 사이에 그려지는 갈등구조와 대립관계는 이야기에 감칠맛을 더하며 스토리의 흥미를 유발하곤 하는데, 시대가 원하는 독립영웅의 모습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카모토를 닮은 캐릭터는 궁극적인 메시지를 제시하며 더없는 감동과 여운의 동력이 된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모던보이>의 주인공 해명의 인생반전은 더욱 지독하고 역동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오프닝 장면에서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 속에 그려진, 서구적 스타일과 서양식 유흥문화생활을 향유하며 유행을 선도하던 ‘모던보이’, 어느 면을 봐도 일제강점기란 시대적 배경과 걸맞지 않는 젊은이다. 친일파 2세로 현실에 아부하고 부를 축적하며 안일하게 살아가는 모습, 동경대 출신의 조선총독부 서기관이란 직업, 어린 시절 꿈이 일본인이 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조선독립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는 점, 철없고 성숙하지 못한 사고는 물론 암울한 시기에 걸맞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코믹하고 발랄한 성격까지도 그 시대에 반갑지 않은 이방인의 모습이다. 그런 남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인생을 걸고 독립투사가 된다는 설정은 관객들의 마음을 꽤나 설레게 한다.

사랑, 그 진정한 의미

<모던보이>는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이다. 자칭 낭만의 화신이라 여기는 해명은 일본인 친구 신스케 검사와 클럽에 들렀다가 무대에서 스윙댄스를 추며 열연하던 댄서를 보고 그녀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매력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적극적인 구애 끝에 사랑은 시작되고, 적어도 그녀가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이 폭발해 조선총독부 안에 한바탕의 소란과 난장판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녀의 정체에 대해 단 한순간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집까지 털어 감쪽같이 사라진 그녀의 뒤를 밟으면서 로라, 아사코, 나타샤, 난실이란 다양한 이름 뒤에 여러 직업을 가진 그녀의 실체를 조금씩 알게 되고,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던 비밀스런 작전에 휘말리게 된다.

극심한 충격과 갈등 속에 엇갈리는 그리움과 노여움은 그녀에 대한 사랑만 더욱 깊어지게 할뿐이다. 그녀의 정체가 드러날 때마다 뜻하지 않은 위기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 고문실까지 끌려가 온갖 수난과 고통을 받는다. 둘도 없는 일본인 친구 신스케가 독립군 지하조직과 관련된 ‘테러박’을 찾기 위한 미끼로 자신을 이용했다는 배신감까지 스스로 삭혀야 했다.

해명의 진정한 사랑과 진실한 감성이 깊어질수록 독립군들의 비밀작전에 깊이 관여하게 되고, 그녀의 남편일거란 오해로 질투심까지 유발하게 했던 ‘테러박’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사랑은 극도의 위기감과 벗어날 수 없는 안타까움에 휩싸이게 된다. 조국의 부재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던 남자가, 사랑보다 조국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한 여인을 만나 겪게 되는 파란만장한 인생굴곡이 눈물겹도록 마음에 와 닿는 순간이다.

남겨진 흔적

영화 <모던보이>의 마지막 장면인 독립군들 무리에 뒤섞여 등장하는 해명의 모습에서 ‘모던보이’의 낭만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시대의 유행을 앞서던 개성 넘치는 옷차림, 그를 둘러싼 화려한 경성의 불빛, 낭만적이거나 코믹한 몸짓까지도 그녀와 함께 불꽃처럼 사라져버렸다.

영화는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한껏 부풀린 경성의 모습이 아름다워 시대적 아픔이 더 큰 비극으로 다가오고, 지고지순한 그들의 사랑 때문에 조국 잃은 아픔이 더 큰 설움으로 기억되게 한다. 일제 강점기가 길어지면서 살아가기 위해 친일과 독립운동 사이에서 무엇이든 선택해야 했던 그런 시대에 해명도 그가 사랑했던 여인도 스스로 택한 삶에 충실했음을 우리는 안다. 다만 역사의 암울한 그늘 속에서 시대적인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던 보잘 것 없는 개인의 삶이 해명이 조선의 지도위에 그렸던 난파선을 닮은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시대가 떠맡긴 사명을 다하기 위해 시간의 문을 넘고 폭탄의복을 입고 태극기를 뽑아 흔들 수 있었던 망설임 없는 용기의 흔적들은 애잔한 감동을 전하며 한번 쯤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든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이 두 편의 영화는 과거의 기억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지만, 망각의 늪에 빠져 사적인 감정을 맘껏 누리며 살 수는 현실의 감사함을 잊곤 하는 우리들에게 일종의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조절장치가 되어준다. 그것이 바로 독립이나 광복을 다룬 영화를 봐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종희 / 프리랜서
 

저작권자 © 충북도정소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