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부자유하며 유한한 존재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끝없는 것을 좇는다. 끝이 있는 인간이 끝없는 것을 좇으려 하니 사는 동안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라고 했던가.

『수심결』은 이런 고민을 풀어주는 책이다. 글자대로 ‘마음을 닦는 비결’이다. 보조국사 지눌이 지은 책인데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밝히고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을 알게 한다.

『수심결』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불교의 역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라 불교를 이제 막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에 비유한다면 고려 불교는 활짝 피어난 꽃과 같았다. 왕후장상에서 서민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불교 일색인 고려불교는 겉보기엔 황금시대를 맞이한 듯이 보였으나 신라불교처럼 싱싱한 젊음이 없었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박력이 없었다. 창조와 개혁하려는 노력보다는 이미 쌓아 놓은 기반을 유지하고 행세하기에 바빴다. 승려들은 집권자들과 어울려 궁중출입이 잦았고 그에 따른 폐단도 심해져만 갔다.
그러나 지눌은 당대의 고승이면서도 궁중출입을 아니 하였고 서울에 머무는 것조차 거부하였다.

지눌의 이상은 내적세계의 혁명에 있었다. 내적세계가 근본적으로 혁신되지 않고서는 결코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지눌의 신념이었다. 인간이 인간의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있고 인간의 본성을 떠나서 따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도를 열심히 닦아도 깨달을 수가 없다고 보았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듯이 마음이 어두워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깨쳐야 한다. 마음을 깨친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밖으로만 헤매는 눈길을 안으로 돌려 자기의 마음을 밝혀야 한다. 지눌은 스스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첫째, 내 마음이 참 부처요[자심진불] 내 본성이 참 진리라면[자성진법] 어찌하여 지금의 나는 이와 같이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하여 지눌은 여러 가지 비유와 고사를 들고 있는데 그 요지는 ‘나는 어리석다.’라고 보는 그 생각에 억눌려 자기의 불성을 확인하지 못할 뿐이므로 먼저 그 생각만 쉬면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둘째, 자기가 바로 부처임을 깨달으면 부처로서의 영원한 면과 무한한 능력이 나타나야 할 텐데 왜 오늘날 깨달았다는 사람에게 이런 면이 나타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지눌의 답변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① 우매한 중생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신통을 부려야 하는데 이 신통이라는 것이 지극히 지말적(枝末的)일 뿐 오히려 요망스럽고 괴상한 짓에 속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에 가서 나무하고 우물에서 물 긷는 것이 모두 신통 아님이 없는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이것 밖에서 신통을 찾으니 이는 곧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를 찾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②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처는 분명히 모든 관념적인 제약을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오래도록 나쁜 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 습관이 몸에 배어 일시에 없어지지 아니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익혀온 나쁜 습기마저 완전히 녹이려면 깨달은 다음에 부단히 닦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 체계를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이라고 한다. 종래의 언어와 문자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교종의 강사들로 하여금 마음을 밝히는 참선공부를 하게 하였고, 마음만 밝히면 만사가 다 된다라고 믿는 선사들로 하여금 독단을 삼가하고 바른 길을 걷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였다.

셋째, 우리는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여기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이 원래 ‘진리 덩어리’임을 확신하고 나 밖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방법만 쉬면된다. 자기가 자기의 눈을 볼 수 없다 하여 내 눈을 찾아 헤맨다면 이는 분명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 찾아 헤매고 있는 이 눈이 바로 자기의 눈인 줄만 알면 찾을 생각은 없어진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도 찾으려 하고 깨달으려 하면 천만년이 지나도 허사일 수밖에 없다. 진리를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찾으려는 마음만 쉬어라. 그러면 진리는 제대로 드러난다. 구름 걷히면 태양은 원래 있던 태양 그대로 천하 만물을 두루 비추지 않던가. 세상 사람들이 구름 걷을 생각은 아니 하고 태양 생긴 모양만을 짐작하려고 애를 쓰니 어찌 답답하지 아니한가.

『수심결』은 문장이 간결하고 평이하다. 그래서 널리 읽혀 온 대표적인 명문이므로 현대인이 ‘마음공부’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지눌이 말년을 보낸 전남 순천의 송광사에는 지금도 지눌의 사상을 계승한 불제자들의 찬란한 업적들이 문헌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나라의 스승’노릇을 한 고승들이 열여섯 분이나 된다고 하니 지눌의 사상은 그대로 이 나라의 정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아, 한국인의 정신에 맥맥히 흐르는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이여!

전태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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