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레이크파크 르네상스 – 충북의 물길에 깃든 이야기를 찾아가다 (증평Ⅲ)

블랙스톤벨포레리조트에서 본 원남지.
블랙스톤벨포레리조트에서 본 원남지.

섬길 일일랑 다 하여라. 부모를 섬김에 후회 없이 하고, 앞날을 이끌어갈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로 나라를 돌보게 하라. 물길을 따라 돌아본 증평의 산하에서 효(孝)와 충(忠)을 배웠다. 배운 대로 행하고, 끊임없이 배워 자기를 항상 깨어있게 하며, 의와 예로써 그 도를 다하고자 했던 선비정신을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 운동에 나선 사람들에게서 배운다.    / 글·사진 장태동

 

증평군 도안면 화성3리 상작마을에 있는 곡산연문쌍효각.
증평군 도안면 화성3리 상작마을에 있는 곡산연문쌍효각.

효(孝)를 배우다

 증평읍 용강리에는 어머니가 병이 들자 극진히 돌봤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는 장용기와 그의 처 능성 구씨 부부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안면 광덕리에도 효자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창익은 산토끼회를 먹어야 어머니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의원의 말에 이산저산으로 산토끼를 잡으러 다녔으나 구하지 못하자 안타까워하며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다음날 집안 장독대에 앉아있는 산토끼 한 마리를 보았고, 잡으려고 다가가도 산토끼는 도망가지 않았다.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여기고 산토끼를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이 이야기가 청안현감, 충청감사에게 전해졌고, 효자비와 효자각을 세웠다.

 도안면 도안초등학교 정문 옆 연종록 부부 정효각에는 어머니를 모시던 중 늙으신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이며 극진히 돌본 연종록과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음식을 먹지 않고 100일 동안 어머니 묘 앞에 무릎 꿇고 통곡했다는 연종록의 부인 순흥 안씨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도안면 화성3리 상작마을에는 위독한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다리를 베어 피를 먹여 극진히 돌본 연주운의 이야기와 함께 눈병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보살펴 앞을 보게 한 연주운의 손자 연면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두 효자의 뜻을 기려 곡산연문쌍효각을 세웠다. 현재 화성3리 경로당 부근에 곡산연문쌍효각이 있다.

 

증평군 도안면 송산리에 있는 배극렴 묘역.
증평군 도안면 송산리에 있는 배극렴 묘역.

충(忠)을 보다

 효자 효부 이야기를 싣고 흐르는 문암천은 보강천으로 흘러든다. 보강천으로 흘러드는 또 다른 물길인 삼기천 가에는 조선 개국공신 양무공 황희석을 모신 사당, 양무공사가 있다.

 고려 말인 1381년 전라도에 왜구가 침입하자 황희석은 채찰사로 파견되 어 왜구를 토벌했다. 1388년에는 요동원 정군으로 이성계와 함께 북벌에 나섰다. 1392년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문을 열었다. 그 공을 높이 사 신위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게 했다.

 두타산에서 발원하여 보강천으로 흘러드는 여러 물길 중 송산리를 흐르는 이름 없는 물길 옆에 조선 개국공신 배극렴의 묘가 있다. 배극렴은 고려시대 진주도원수를 지낼 때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토벌했고, 1378년에는 경상도원수로 욕지도에서 왜구를 대파했다. 그해 겨울에는 하동과 진주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고 도망치는 왜구를 끝까지 쫓아가 크게 이겼다.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조선의 문을 열 었고, 개국공신이 되었다.

 나라의 이름은 바뀌었으나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대로였으니, 고려 말 부정부패를 일삼는, 권력과 부의 축적에 눈먼 탐관오리들의 전횡을 끝내고 그들에게 핍박받던 백성들을 위한 새 질서가 필요하다고 여긴 혁명의 의지를 정도전, 이성계 등과 함께 했던 것이다.

 나라는 백성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뜻을 펼칠 기회를 넓혀 희망을 남기는 것이 나라를 위한 충(忠)이다.

 

도안면 송정리 통미 마을을 흘러온 물줄기가 문암천과 만나는 곳. 사진 왼 쪽 위에 300년 넘은 버드나무가 보인다.
도안면 송정리 통미 마을을 흘러온 물줄기가 문암천과 만나는 곳. 사진 왼 쪽 위에 300년 넘은 버드나무가 보인다.

상선약수, 흐르는 물처럼

 배극렴 묘역 옆 두타산에서 흘러내린 가는 물줄기에 마을 빨래터가 있다.(옛날에는 지금 자리 위에 빨래터가 있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물줄기에 기대어 마을이 생겼다. 흐르는 물이 사람들에게 주는 이로움이다. 도덕경 8장이 떠올랐다. ‘상선약수(上善若 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로 시작하는 글은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로 이어 지다가 마지막에 ‘오로지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라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배극렴 묘역 옆 빨래터가 그렇고, 문암천으로 흘러 드는 도안면 송정리 통미 마을 이름 없는 물줄기가 그렇다.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에는 마을이 다른 곳에 있었는데, 돗구아비(도깨비)들의 장난이 심해서 지금의 자리로 마을을 옮겼다. 그러고 또 한 세월 지나 큰 홍수로 산마루 언덕이 마을 가운데로 떠내려와서 물줄기가 지금의 형국이 됐다. 전체적으로 마을은 큰 배를 닮아서 200여 년 전에 팽나무를 심어 돛대로 삼았다고 한다. 팽나무 옆에는 버드나무 고목도 보인다. 그 옆에 커다란 참나무와 느티나무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어르신이 일러준 대로 발길을 놓아 도착한 곳에는 고인돌이 있었다. 청동기 시대의 것이라고 하니, 예로부터 이 곳 물줄기에 기대어 사람들이 살았던 것이다. 

 송정리 통미 마을을 지난 물줄기는 입장1교를 지나 문암천과 만난다. 300년 넘게 살고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두 물줄기가 만나는 물가에 있다.

 연암저수지 둑에 올라 물 아래 마을을 본다. 넓은 들녘과 마을이 어울렸다. 빈 겨울 들판이 따듯하게 보인다. 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낮은 곳으로 흘러 지난여름 저 들녘의 생명들을 살게 해서일까? 뿌리는 잎을 위해, 잎은 뿌리를 위해, 꽃 피우고 열매 맺었던 한 순 간도 빛나지 않는게 없었다.

 

연병호 항일역사공원에 있는 연병호 상과 조형물.
연병호 항일역사공원에 있는 연병호 상과 조형물.
연병호 생가.
연병호 생가.

효(孝)와 충(忠), 항일독립운동의 빛나는 얼로 살아나다

 문암 저수지에서 벼루재를 넘으면 블랙스톤벨포레리조트다. 진천, 음성, 증평에 걸쳐 있는 원남지의 증평 권역 풍경을 그곳에서 보았다. 음성에서 흘러 온 초평천이 증평을 지나 진천으로 흘러간다. 두타산 북사면 원남지의 풍경은 시원하게 펼쳐졌고 겨울 오후의 햇살은 눈 쌓인 언덕 하얀 목책을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음성에서 시작된 문암천이 증평으로 흘러들어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 연병호 생가와 연병호항일역사 공원이 있다. 증평의 물길을 따라 돌아다녔던 하루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맞이했다.

 활짝 열린 사립문은 ‘잘왔다’는 인사 같았다. 오후의 긴 햇살과 함께 사립문으로 들어섰다. 낮은 초가 지붕은 뒷동산을 닮아 금방이라도 둥그런 달이 뜰 것 같았다. 독립운동가 연병호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아버지 연채우 선생이 살던 초가 2간 집을 선생이 직접 뒷산에서 나무를 해서 다시 집을 지었다고 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슬레이트지붕으로 고쳤다가 1986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연병호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그해 서울로 들어와 이병철, 조용주, 안재홍 등과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했다. 애국부인회 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선고 받고,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북경, 만주, 상해에서 활동했다. 대한민국임시의 정원 충청도의원, 한국혁명당조직, 신한독립당선전위원장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 한국 국민당 조직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동하던 중 1937년 중국에서 체포되어 6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초대 제헌국회의원이 되어 헌법기초위원 으로 활동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감 찰관으로 활동했다. 연병호 생가 옆 연병호항일기념관에서 그의 생을 보았다.

 [동포여 우리는 참담한 멸망을 면하야 자생을 도하려 하나니, 전하면 생하고, 부전하면 사할지라… 유아배달족 신남신녀는 이천만의 철혈을 일합, 일거에 적을 파쇄하야 무궁화삼천리조국의 국권을 광복하고 백두산상 태극기하에 명면 금일을 기념하기로 신전에 맹서합시다] - 1920년 3월1일 독립신문에 기고한 연병호 선생의 글 중에서-

 

증평 추성산성 동치성과 그 앞에 펼쳐진 풍경.
증평 추성산성 동치성과 그 앞에 펼쳐진 풍경.

취/재/후/기 - 추성산성

아는 사람만 아는 증평의 전망 좋은 산책 코스

 증평의 명소 추성산성은 4~5세기 백제시대에 흙으로 벽을 쌓은 산성이다. 한성백제 때 산성중 최초로 우물과 배수로 시설을 돌로 쌓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살던 주거 지는 한성백제 때 산성 중 최대 규모라고 한다.

 남성과 북성이 있는데 잘 정비된 남성을 한 바퀴 돌아봤다. 남수문지를 지나 동치성으로 향했다. 증평의 동북쪽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북동문이 있던 곳을 지나, 남성 내성 우물터에 도착했다. 지름 1m, 깊이 0.8m 정도 되는 우물이었다고 한다. 우물 내부에서 발견된 숯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4세기 것으로 확인됐다. 남성 내성 수혈주거지 터도 지났다. 가로 8.5m, 세로 4.72m, 깊이 1.16m 규모의 움집 자리였다. 망대지로 올라갔다. 남성 중 가장 높은 곳이었다. 전망이 사방으로 통쾌하게 터졌다. 한참 머물렀다. 사람들이 이따금 오갔다. 아는 사람만 아는 증평의 전망 좋은 산책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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