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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처럼 지휘자처럼
연주자처럼 지휘자처럼
  • 함께하는 충북
  • 승인 2019.08.2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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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폭우다. 그게 효시가 되었다. 물받이 타고 내려오던 빗물이 콸콸 쏟아지면서 갑작스럽게 휘몰이 장단이다. 맨 처음 떨어진 물이 닿기도 전에 뒤따르던 물줄기가 굉장한 기세로 맞부딪친다. 급하게 쏟아지는 서슬이 이중 삼중 메아리 되어 퐁퐁 쪼록퐁 빠르게 내리구른다.

곧바로 장독대 생철지붕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짜르르 짜르르 굉음이 귀를 찢는다. 번개가 치고 우르릉 쾅쾅 천둥이 요란하다. 머리카락이 쭈뼛해진다. 그리고는 매지구름 속에서 퍼붓는 장대 같은 빗줄기.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수선한 중에도 이웃집 처마 끝의 풍경까지 가세를 해서 천연 타악기 소리다.

갑작스럽게 바뀌는 선율 때문인지 두려운 마음도 사라졌다. 깊은 밤 모서리가 깨진 채 돋아난 별도 자그마한 타악기 뉘앙스다. 폭풍이 지난 뒤 떠오를 때 보면 한바탕 두들기고 난 후의 여운처럼 해맑다. 허구한 날 몰아치는 태풍과 습기찬 바람은 금속성 음까지 변화시키면서 투명한 여운을 띄워올린다.

천둥소리가 덩치 큰 타악기 음향이라면 여치와 쓰르라미가 앙바틈한 날개를 쫑알대고 소리를 낼 때는 심벌즈나 탬버린을 치는 듯 귀엽다. 장마가 끝나고 초가을이면 그렇게 새로운 분위기로 바뀐다. 운율에 민감성 가을이라 서식하는 곤충까지도 다양한 음악성을 드러낸 것일까. 가을 하늘 북판도 터질 듯 팽팽해서 새 한 마리만 지나가도 터엉 텅 북소리가 울리는 느낌이다. 명주 이불 같은 새털구름도 여름내 늘어져 있던 먹구름과는 달리 하늘 저편으로 튀어나간다.

가을비 내릴 때도 소리는 자분자분 퍼졌다. 연못에 뛰어든 가랑비는 곧장 피아노 소리로 흘러갔다. 단순한 리듬에 묻어 3잇단음표 또는 5잇단음표로까지 확산된다. 까다로운 음정인데 빗줄기가 약해지면서 듣기가 편하다. 한밤중에는 특별히 검은 건반 소리처럼 해맑다. 깜깜해지면서 온 하루도 아닌 밤에만 들리는 반음이 합주나 펼치듯 감미롭다. 천둥이니 번개는 타악기도 되지만 그 다음 빗줄기는 건반악기 선율처럼 리드미컬했던 것.

얼마 후 하늘이 군청색으로 바뀌는데 그걸 기화로 뛰어내리는 도토리도 한몫 거든다. 콩이야 팥이야 꼬투리도 터져나갈 듯 팽팽하다. 긴장이 풀려 와짝 쏟아질 때는 피아노의 건반을 일제히 내리긋는 듯했다. 꼬투리 속에서 목하 대기 중이던 녹두와 쏟아지는 깻송이, 벼이삭이 마를 때의 바스락 소리도 잘만 구성하면 특유의 악기로 손색이 없다. 실로폰같이 톡톡 쳐 주는 동시 혼자 튀어 오르며 소리를 낸다. 두드리고 눌러대는 건반악기와 타악기 취향을 두루 갖추었다.

낙엽을 밟을 때도 비슷하게 들렸다. 가랑비 흩뿌리고 난 뒤 은행잎 쌓인 가로수를 걷다 보면 바스락 소리가 현악기를 일시에 뜯는 것 같다. 빈 가지 남은 잎도 언제 떨어질지 불안한데 쟁그랑 소리가 야단스럽다. 모든 악기가 그렇게 자연의 소리를 재현한다면 낙엽은 조락의 아쉬움을 표현한다. 가랑비가 자주 내리면 소리는 간데없이 살얼음이 잡히고 겨울바람에 또 한바탕 특유의 악상이 나올 듯하다.

초겨울 앙상해진 나무는 바람의 활줄로 그어대는 현악기였다. 물기 머금은 바람은 꽃눈을 싸안는 손길처럼 부드럽다.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씨앗이 얼지 않게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높파람 역시 저마다의 소리로 화음에 동참한다. 눈까지 내리면 담방담방 겨울새 또한 건반을 타고 뛰어다니는 모습이다. 날씨는 춥고 높파람이 극성일 때 땅속은 오히려 따스해지곤 했으므로.

그 위에 유일한 앙상블은 고드름이었다. 들쭉날쭉 이어진 것을 보면 겨울 바다 저어가는 뗏목과 비스름했다. 바람이 불면 실로폰 소리가 딩동 울릴 것 같다. 깊어가는 겨울밤 고즈넉한 타종소리로 그보다 적절한 게 있을까. 소리는 닮아도 모양까지 비슷한 건 드물다. 고드름은 결국 타악기 모습이고 바람에 울어대는 겨울나무 현악기와 구색이 맞다.

해가 바뀌고 봄이 되면 관악기 취향으로 나간다. 얼음이 깨지면 나무는 그때부터 물이 오른다. 호드기니 버들피리니 하면서 줄기를 꺾어 불듯 겨울잠에서 눈 뜬 봄도 아기자기한 멜로디를 엮는다. 알을 까고 새끼를 치는 산새들의 예쁘장한 소리도 몸체를 연결하면서 조절하는 관악기 그대로이다. 바람에 일렁일 때는 피리소리가 유달리 섬세하고 밀밭에 둥지 튼 노고지리도 목을 쑥 빼물면서 노래 부른다.

금속으로 된 관악기는 입김을 불어넣어야 맑고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그 체질을 닮은 듯 봄이면 새들도 귀엽고 경쾌한 소리로 우짖는다. 봄비가 내릴 때의 감미로운 흐름은 피아노 건반의 선율을 닮았다. 푸른 하늘과 연둣빛 초원을 배경으로 솔바람까지 살랑대면 아름다운 화음으로 울려 퍼지곤 했다.

계절마다 악기의 특징은 있으나 딱히 뭐라고 정하기는 어렵다. 새가 우는 봄은 관악기 같은데 이따금 보슬비는 건반악기 취향이다. 천둥 치는 여름 또한 타악기로 생각했더니 소낙비 내릴 때는 빠른 피아노곡이다. 가을 역시 팽팽하게 올라간 하늘을 보면 타악기에 가랑비 내릴 때는 건반악기 식이다. 계절별로는 독특한 악기로 볼 수 있는데 간간이 비가 흩뿌리면서 전체적으로 비슷한 악상이 드러난다.

그런 모습은 겨울에도 똑같이 이어진다. 산새들 관악기와 이슬비 등의 건반악기가 어울리듯 겨울나무 현악기 속에 실로폰 고드름이 끼어드는 기본적 배치도가 그려진다. 제가끔 떨어져서 그렇지 한 곳에 모을 수 있다면 희대의 음악성이 드러날 것 같다. 철철 바뀌는 날씨 속에서 파트별로 소리를 내는 천연악단의 면모가 그려진다.

같은 현악기라도 바이올린 파트가 있고 더블베이스와 첼로 역시 위치가 다르다. 관악기 또한 목관악기인 플롯이니 클라리넷 오보에 등과 트럼펫과 호른 등의 금관 악기로 나누어진다. 적게는 60명에서 많게는 100명까지 오케스트라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철이 바뀔 때마다 감상하는 운치도 나름 괜찮다. 그 위에 지휘를 맡은 바람이 한눈만 팔지 않으면 드물게 신비한 음역이 만들어질 테니까.

계절별 파트가 아닌 제풀에 갈라지는 서슬을 한 꿰미에 적고 녹음할 수 있으니 천연의 악단으로 손색이 없다. 별도로 연습하고 익히지 않아도 해마다 희귀한 앙상블이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 모든 음악적 배경을 관장한다. 우리 삶 역시 장마철의 소낙비 휘몰이처럼 긴장의 순간에 봄 가을 서늘한 바람처럼 해맑은 이미지가 있다. 나름 인생을 연주하자니 음색에 따른 조율도 필요하지 않을까. 연주자처럼 지휘자처럼.

 

/ 이정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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