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으로 감지하는 엄마의 비 소식이 또 적중했다. 오늘 아침, 햇살이 처마 끝에 부딪혀 노랗게 부서지고 있었다. 엄마는 삭신타령을 하셨다. 이렇게 쨍쨍한데 설마 설마하며 엄마가 전해주는 비 예보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점심을 지나자 비가 솔솔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비오는 날이면 퇴색하지 않는 지난날의 아픈 사연과 함께 뼈마디의 아픔을 토해 놓으신다. 난 골백번도 더 들은 소싯적 얘기를 노래처럼 또 듣는다. 귀를 열어 엄마의 지난날을 들으며 허공을 긋는 빗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역시 엄마는 하늘의 전령사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는 한숨 소리와 함께 고생 많던 지난 시절 다친 뼈마디와 그 뼈에 얽힌 사연을 또 털어 놓으신다. 다리는 교통사고로 부러져서 아프고, 손마디는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밭을 너무 많이 매서 아프고, 어깨는 모진 남편 만나 일을 혼자 다 해서 쑤시는 것이라고 하신다. 부모 복 없는 년은 서방복도 없고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고 한숨을 쉬신다. 팔순을 넘기신 엄마는 마음이 약해졌는지 요즘 들어 전보다 더 팔자타령이 잦아지셨다. 나는 엄마의 육체적 아픔보다 더 진한 가슴 속 깊이 맺힌 응어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그러다 아픔의 뿌리가 있는 엄마의 몸을 여기저기 주물러 드린다. 뿌리엔 단단한 옹이가 박힌 듯 내 손끝 여기저기에 딱딱하게 젖어든다.

오후 내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비가 왔다. 나는 망연히 창밖으로 난 세상을 쳐다보다가 우산으로 빗줄기를 꺾으며 마당으로 나갔다. 날 구지 하는 것도 아니고 비오는 데 정신 나간 년 마냥 어딜 나가냐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길을 나섰다. 마당 입구에 있는 백구도 빗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말리는 듯 컹컹거리며 짖어대고 있었다. 엄마 집에서 가장 가까 우면서 빗줄기를 한눈에 가장 많이 담을 수 있는 곳을 생각했다. 퍼뜩 떠오른 곳이 벽골제였다. 벽골제란 벽골의 둑이라는 뜻이며 벽골은 ‘벼의 고을’ 이라는 의미로 김제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그곳은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국시대의 3대 저수지로, 너른 평야와 지평선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엄마를 보러 올 때면 가끔 들러 푸른 벌판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가는 곳이다.

이십여 분을 달려 벽골제에 다다랐다. 우산에 부딪히며 커다랗게 확대되는 빗소리가 좋았다. 나는 온몸이 귀가 되어 빗소리를 담는다. 비가 와서 그런지 벽골제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명인학당을 지나고 짚 풀 공방 앞에서 셀카를 찍었다. 생태연못 다리 위에서도 찰칵 찰각 셔터를 눌러 보았다. 한참을 빗속을 걷다가 잠시 정자에 앉았다. 풀잎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비에 온몸을 적시며 초록의 몸짓으로 화답하고, 키 큰 나무들은 가지를 흔들며 하늘에서 온 손님을 반기는 듯 했다. 연못은 방울방울 떨어지는 비를 맞아 동그란 파문을 여기저기 그려내며 희뿌연 안개 같은 미소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다시 걸었다. 대나무로 만들었다는 거대한 쌍용 앞에서 우산을 얼굴과 어깨사이에 끼고 어설프게 셀카를 찍자 지나가던 사람이 찍어준다며 다가왔다. 멋쩍게 웃으며 비요일의 풍경에 나를 살짝 끼워 넣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단야루를 지나 단야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단야각 앞에는 단야에 얽힌 설화가 적혀있었다. 신라 원성왕 때 김제 태수의 딸인 단야가 스스로 청룡의 제물이 되어 아버지의 살인을 막고 벽골제 보수공사를 무사히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설화를 읽고 나니 그저 스치듯 지나쳤던 쌍용이 다시 보였고 설핏 보았던 단야각과 단야루가 새롭게 다가왔다. 설화를 배경으로 그린 듯한 착하게 생긴 단야의 얼굴을 보며 나를 돌아본다. 나는 엄마를 위해서 무엇을 했으며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가슴 가득 아리게 번져왔다. 단야처럼 목숨을 바치진 못해도 우리 엄마를 위해 마음만은 바칠 수 있는 딸이 되고 싶었다. 빨리 엄마 곁으로 가서 삭신의 아픔보다 더 아픈 지난 세월의 아픔을 꾹꾹 만져줘야겠다. 마음을 다하면 엄마의 아픔이 조금은 녹아내릴 수 있으리라. 빗줄기를 꺾으며 다시 빗속으로 향한다.

 

김 희 숙 / 수필가,원봉초등학교병설유치원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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