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사유의 공간
사유의 공간
  • 함께하는 충북
  • 승인 2018.10.23 17: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창에 스치는 가을정취가 아름답다. 지난 주말 회색빛 어둠을 물리치고 지인들과 멀리 전남으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일상의 분주한 삶에서 벗어나니 그동안 놓치고 있던 '삶의 여유'가 찾아왔다. 옆에서 아내가 간간이 들려주는 쓴 소리도 사랑노래로 들려온다.

10년 전 어느 해 여름 소쇄원(瀟灑園)에 들렀다가 그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깨끗하고 시원함을 뜻하는 소쇄는 양산보의 호이다. 양산보는 열다섯이 되던 해에 정암 조광조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여 1519년 기묘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낙방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중종이 그를 친히 불러 위로의 말과 함께 지필묵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괴수가 되었다 하여 화순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에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소새원을 지어 현세적인 꿈을 접고 은둔하여 처사로서의 삶을 산 것이다.

우리일행이 대나무길 사이로 들어서자 소쇄원이 반겨준다. 빛의 치장도 없어 소박한 모습에 발걸음이 머문다. 자연의 풍경과 하나 되어 어우러진 곡선의 기와, 작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와 청량한 대나무 숲이 저마다 힐링의 기운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소쇄원이야말로 소리와 그늘과 시의 정원이며 자연의 순리를 수용한 정원이다. 정(靜)과 동(動), 그늘과 볕의 정원이라 하겠다. 꽃과 나무 하나하나 기와 한 장에도 선비의 기상과 사림(士林)의 정신이 담겨 있었다.

계곡 옆 정자의 기둥하나하나가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듯해 그 기둥하나의 값어치가 일억을 넘는다는 '광풍각(光風閣)'이 돋보인다. 광풍각 뒤편으로 난 몇 개의 돌계단을 오른 곳에 제월당(霽月堂)이 마주한다. 대청마루와 방 한 칸이 높지도 낮지도 않아 편안하다. 독서하기도 좋고 오롯이 사유할 수 있는 간결한 방, 이곳에 머물면 희로애락에서 벗어나 자연의 일원으로 다시 서는 느낌이다. 더욱이 가장 높이 있어 조망이 좋은 '제월당(霽月堂)'에서는 수백 년 전 이곳을 찾은 송순, 정철, 송시열 등 조선 중기 문인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던 곳으로 지금도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는 우암 송시열이 쓴 현판아래에서 번갈아 사진을 찍었다. 사각으로 열린 공간에서는 사방으로 투영되는 풍광 속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다.

명옥헌 원림(鳴玉軒 園林)은 초록이 무성한 정원과 조그만 연못, 정원 위쪽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자로 그 격이 높다. 특히 여름에 눈길을 끌었던 것은 철쭉이나 진달래보다 더 붉은 진분홍색 꽃이 만개한 여러 그루의 배롱나무들이었다. 사방이 미닫이문으로 된 정자에 올라 앉아 열린 미닫이문을 통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맛보며 행복에 잠겼다. 이 바람 소리를 구슬이 우는 소리에 빗대어 정자 이름을 명옥헌(鳴玉軒)이라 했는가. 명옥헌에 앉아 푸르른 숲속에서 홀로 붉은 자태를 뽐내는 배롱나무 꽃이 만개한 원림을 완상(玩賞)하는 것이 옛 선비의 고고한 풍류였을까.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그 때의 풍광을 떠올리며 가을의 정취를 맛보니 감회가 새롭다.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소쇄원(瀟灑園)은 자연을 소중히 하며 멋을 키워낸 조상들의 지혜를 떠올리게 한다. 또 하나의 깨달음은 정자에 앉아 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을 바라보며 화려함과 정교함을 뽐내는 영국과 프랑스, 일본의 정원보다 훌륭한 정원의 보고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나라 각 지역에는 오랜 역사를 지니며 깊이 있고 풍부한 이야기와 소쇄원처럼 얘기 거리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문화유산이 많이 있다. 이러한 지역 특성을 살리고 발굴하여 창의적으로 개발한다면 분명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것이다. 소쇄원 일원을 거닐며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역량에 맞는 길을 선택하고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관리를 해야 하는 것도 여행과 인생의 비슷한 점인 듯하다. 정상에 영원히 머물 수 없듯이 인생도 정점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

늘 자기관리를 해야 하듯 삶에서도 자기관리는 물론 주변관리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점에 올랐던 이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등을 돌리고 외면당하는 것은 그들의 배신이 아니라 관리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 더 크지 않을까. 자신의 부덕함이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자만심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 있다.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며 함께한 소쇄원 여정에서 조상의 지혜와 겸손함, 자기관리로 은혜롭게 살아야 한다는 귀한 깨달음을 얻고 가을 속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정 관 영 /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겸임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28515)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82(문화동)
  • 대표전화 : 043)220-2083
  • Copyright © 2012~2019 충청북도인터넷신문. All rights reserved.
  • 본 웹사이트는 이메일 주소가 무단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