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싶었다. 원피스 둘과 속옷 두벌, 그리고 선글라스. 머리를 감기 싫은 날을 생각해서 질끈 동여맬 고무줄도 잊지 않았다. 가장 최소한의 짐을 챙겨 깃털처럼 가볍게 떠돌고 싶었다. 마치 이별은 내게 찾아온 마지막 아픔인양 한 여름을 마음껏 쏘다녔다.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를 돌고 담양의 죽녹원 김제의 벽골제, 전주의 덕진공원을 헤매며 여름 속을 서성였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오롯이 혼자가 되어 거닐었다. 돌아오는 길, 지퍼를 채우듯 철길을 달리는 기차를 보며 생각했다. ‘다시 올 수 없는 나의 정처 없었던 여름아 안녕!’ 그리고 기억들을 배낭 속에 꾹꾹 눌러 추억의 지퍼를 닫아버렸다.

돌아와서 듣는, 내 작은 집 처마 밑에서 울리는 풍경소리가 좋다. 아득하게 퍼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난 왜 말레이시아의 길고양이가 떠오를까? 그 갸릉거리던 유혹의 소리가. 세상 속에 떠돌며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지만 늘 빈손인 나.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만난 먼지 쓴 길고양이의 애처로운 눈빛이 어쩌면 나처럼 여겨진 걸까.

이번 주는 고요하게 묻혀 지내리라.

텃밭으로 갔다. 붉어지는 방울토마토를 한바구니 땄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 저홀로 붉게 익어가는 것이 기특하다. 보라색 가지도 주렁주렁 달려 내 시선을 한껏 베어간다. 얼갈이는 구멍이 숭숭 나서 얼갈이 인지 가을 낙엽 뼈대인진 분간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자연이 준 선물이니 고마운 마음으로 딴다. 방울토마토를 설렁설렁 씻어 접시에 담는다. 소파에 누워 그 탱탱한 붉은 알을 집어 든다. 동네를 내려다보며 누운 채 입에 넣는다. 물로만 대충 씻은 토마토건만 약을 치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자꾸 손이 간다. 인적이 없는 마을에는 한낮의 투명한 바람이 간간히 살점을 뿌려대고 있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에 햇볕이 짱짱하다.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내 눈에도 그 아까운 햇볕이 들어왔다. 퍼뜩 내다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내 돌아다니기만 하는 방랑기 많은 주인을 만나 햇볕을 쐬어볼 겨를도 없이 눅눅한 냄새가 피어나는 이불과 세간살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햇볕을 품은 바람을 가득 넣어 주어야겠다. 벌떡 일어나 이불을 빨래 줄에 내다 널었다. 더 이상 널 빨랫줄이 없을 때까지 이불이란 이불을 죄다 널었다. 방석은 의자에 세워서 널고 테이블보는 탁자에 걸쳐 널었다. 주인 없는 집의 습기와 어둠이 슬며시 자리 잡은 서랍장도 낑낑거리며 날랐다. 어느 틈에 젖어서 곰팡내가 폴폴 나는 작은 가구도 내다 널었다. 작은 방에 깔아두었던 돗자리도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었다. 락스를 수건에 적셔 구석구석 닦아보지만 회생 불가할 듯하다. 일단 마당의 넓적한 바위 위에 널어놓는다. 다음에 떠돌 때는 문을 열어 놓고 나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안의 물건들을 햇볕에 널었다.

발코니에 내어 놓은 식탁은 울룩불룩 하다. 집을 비운사이 비의 습격을 받은 상판이 젖고 마르고를 반복했는지 제 형태를 잃어버린 채 울고 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다가 상판 위에 타일을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어릴 적 엄마가 화장실과 마당 수돗가에 조각 타일을 붙이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도 창고를 뒤져보면 공사하고 남은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창고 문을 열었다. 타일이 있었다. 욕실 공사를 하고 남은 재료 인 듯 했다. 다행히 그 옆에 타일용 시멘트도 있었다. 일단 하얀 시멘트를 개서 식탁위에 덮었다. 그리고 얇게 펴 발랐다. 그런 후 그 위에 타일을 덮었다. 타일을 일부는 가로로 일부는 세로로 붙였다. 그래도 남은 공간에는 타일을 망치로 깨트려 조각조각 붙였다. 붙이고 나니 제법 그럴싸하다. 집안 구석구석을 정돈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후련했다.

어느덧 산 그림자가 어스름 마당 가득 내려왔다. 커피를 타서 식탁에 초를 밝혔다. 저녁별이 잔속으로 떨어진다. 제법 싸늘해진 밤바람을 몸에 감으며 마시는 커피가 향기롭다. 말레이시아의 태양아래 홀로 자신을 말리던 길 고양이의 노릇한 털이 커피 향을 타고 아득하게 떠올랐다. 나도 삶에 지쳐 눅눅해 진 마음을 별빛 아래 바싹 말려 볼까나. 별빛이 가만히 내 몸을 쓰다듬는다. 잘 익을 거라고, 잘 말라 갈 거라고 토닥인다.

 

김 희 숙 / 수필가,원봉초등학교병설유치원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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