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는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협조하며 국권을 상실케 하거나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들에게 위해를 가한 자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는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올해는 특히 삼일운동 99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는 언제쯤 이 땅에서 사라질까? 언제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을까.

친일파 중 가장 유명한 이들은 ‘을사오적’이다. 을사오적의 면면은 화려하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 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한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외무행정을 관장하던 지금으로 따지면 외교부장관인 박제순, 내무행정을 총괄하던 이지용, 군부대신의 이근택, 교육부장관격인 학부대신의 이완용, 농상부대신의 권중현이 주인공이다.

을사늑약의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나 말이 조약이지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정책의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외교권 포기, 통감부 설치라는 내용을 담은 부당한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대외적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며 감독기구인 통감부의 지휘를 받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나라의 실질적인 주권을 포기하게 되는 강제조약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을사늑약을 주도한 을사오적이 처음부터 매국노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외부대신 박제순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추진하는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었던 인물이나 후에 찬성한다. 이완용은 고종황제를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계획한 인물 중 하나이며 제2대 독립협회의 회장이었다.

을사오적의 대부분은 을사늑약 이후 승진가도를 달리는데 충청북도 충주가 태생인 군부대신 이근택은 한일병합에 대한 공로로 일제가 주는 ‘자작 작위’를 받는다. 이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는데 이때부터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게 된다. 당시 100원이 지금의 5~6백만원 정도로 추정되니 약 8000만원~1억원의 연봉을 받은 셈이다. 이후 한국병합에 대한 기념장을 받았으며 조선총독부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 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협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충북 영동 출생의 농상부대신 권중현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삼림경영협동약관을 체결하여 국내 이권, 즉 자원을 일제에 넘겨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당시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이 알려지며 민중들이 스스로 일어나 외적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전쟁이 확대된다. 권중현은 확대되는 의병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는 등 부단히 민족반역행위를 하는데 앞장선다.

앞의 두 친일파와 다르게 본관이 청주인 한규설은 1905년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의정부참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직한다. 이때 을사늑약을 일제가 밀어붙이는데 이것을 앞장서서 반대한다. 일제는 갖은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한규설은 뜻을 굽히지 않고 감금 당했다가 결국 조약이 체결된 후 파면된다. 이후 징계에서 풀려나고 일제가 남작의 작위를 주었으나 거절한다. 그는 칩거생활을 하다 조선교육회를 창립했다고 전해진다.

“친일을 하다 독립운동을 하면 ‘독립운동가’로 기억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친일을 하면 ‘친일파’로 기억 한다”. 언젠가 들었던 강의에서는 ‘끝’의 중요성을 친일파로 비유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공직자들의 도덕성과 역사 의식 뿐만 아니라, 어느 자리에서든, 어느 시간에서든, 누구와 함께든 끝이 아름답기를 소망한다.

이 기 수 / 충청북도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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