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삼일공원에는 독립운동가 우당 권동진 선생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인 그는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어릴 때 서울로 이주하여 조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무관으로 알려져 있다. 33인 민족대표 중에 유일한 무관 출신으로 그의 삶에는 조선 개화기부터 해방까지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격동이 함께한다.

권동진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무관에 임명된다. 임오군란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연체된 봉급에 대해 정부가 불량 쌀을 지급해 일어난 난이다. 군란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이 더욱 중요한데 이때 10년 전 실각했던 흥선대원군과 척화파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명성황후와 외척 민씨 제거 및 비리 척결, 일본과 서양세력에 대한 배척운동으로 확대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 난은 명성황후를 놓친데다가 청나라군이 개입하며 진압됐다. 흥선대원군은 텐진으로 끌려가고 척화파들은 제거됐고, 청나라와 결탁한 명성황후가 충주에 환궁하면서 명성 황후의 외척들이 조정을 완전 장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청나라에 대한 의존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키고, 군사고문을 보내 군대를 감시하게 하였으며 재정 고문을 파견해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섭하게 된다. 심지어 외교 고문중의 한명인 뮐렌도르프의 주도로 당오전을 발행하게 되면서 조선의 경제를 교란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한편 권동진은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될 때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하는데 조선인 행동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며 1907년까지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하수인으로 그를 지목하며 일본에게 망명자를 송환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일본 정부의 거절로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1919년 권동진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도을 주도하게 된다.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 삼창을 외치고 현장에 도착한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투옥되었다가 1923년 출옥한다. 이후 천도교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광복 이후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된다.1945년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자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이기수 충북 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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