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만의 황금개띠 해! 벅찬 가슴으로 새날을 맞았다. 소망을 꿈꾸며 나라가 태평하고 생활이 안정되길 바라는 마음은 우리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현 사회는 서로가 반목하며 과거를 심판하는 일로 날이 지샌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를 하게 된다. 제아무리 철두철미한 사람도, 당대의 훌륭한 성현군자도 실수는 하게 마련이다. 어쩌면 인생은 그 자체가 실수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이 실수에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으려니 하고 넘길 수 있는 작은 실수도 있고 그 정도가 지나쳐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실수도 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평생을 후회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순간의 판단 잘못이 엄청난 결과를 낳고 있는 예도 종종 본다.

얼마 전 미국의 한 병원에서 물리치료사가 착오를 일으켜 엉뚱하게도 다른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는 바람에 환자가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병원에서 당뇨병으로 절단하려던 환자의 오른쪽 다리 대신 왼쪽의 성한 다리를 절단해 이 환자는 결국 두 다리를 모두 잃어야 했던 일도 있었다.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더욱이 40년 경력의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 병원 의사인 다스 굽타는 2006년 최대 위기를 맞는다. 환자의 아홉 번째 갈비뼈에서 떼어내야 할 조직을 여덟 번째 갈비뼈에서 떼어낸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환자의 가족을 찾아갔다. “저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환자분께 큰 해를 끼쳤습니다.” 환자의 가족은 굽타를 고소하지 않았다. 즉각적이고도 솔직한 사과가 어떻게 피해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과는 실수와 용서를 이어주는 다리다. 내가 한 실수나 잘못에 대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진정한 사과는 사과를 하는 사람이 피해자 혹은 대중들에게 진심으로 연결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많은 사람들은 자아도취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비가 내렸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바닥은 젖어 있었다.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를 방문해 추모비 앞에 헌화했다. 하지만 갑자기 빌리 브란트가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이자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하지만 그는 조국을 대신해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헌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사과가 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으리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폴란드는 물론 유대인도 이런 독일 총리의 모습에 감동했다. 전 세계도 독일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들였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나는 독일보다 독일 총리를 더 신뢰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독일의 동방정책은 성공했고, 많은 역사가는 이런 동방정책이 결국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피조물 가운데 가장 완벽한 걸 작품이라고 하는 인간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실수투성이다. 다만 그 이상을 능가하는 신의 작품이 없기 때문에 신비로울 뿐이다. 인간의 신체적 결함을 고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의사가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언젠가 남의 가게에 들어가 동전 몇 백 원을 훔친 중학생을 절도죄로 체포한 사건이 있었다. 남의 재물을 절취하는 행위를 절도라고 한다면 이 학생의 행위는 형법에서 말하는 절도죄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건을 보면서 어린 학생의 순간적인 충동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너무 가혹하게 다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관용을 모르는 법이 학생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는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범죄의 싹을 일찍이 뽑아 없애버리겠다는 단호한 법의 의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 어디 발본색원 할 것이 처벌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깨끗한 사회이던가.

외세도 심각한데 하물며 국내 정국은 예측이 되지 않는다. 눈만 뜨면 남을 속이고 모함하며 빼앗고 각축을 벌이며 사는 사회다. 정신의 결함을 감추려고 꾸며낸 육체의 속임수가 바로 위엄이라는 말이 있듯이 법의 위엄만을 앞세운 법집행은 경우에 따라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견문발검(見蚊拔劍)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복(滿復)에는 사상이 없듯이 지나친 완벽은 오히려 무의미할 수도 있다. 실수가 없는 사회는 그 존속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 난국을 국민통합으로 삼고, 미래를 향해 용서할 줄 아는 너그러움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칼이 날카롭기만 하다고 해서 명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정 관 영 / 공학박사, 우석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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