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의 입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혀’라는 기관이다. ‘혀’라는 명칭은 사람들이 붙여준 것인데 나의 생김새는 솔직히 못생긴 편에 속한다. 다행히 길쭉하게 생긴 내 모양새를 입술이 숨겨주고 있어 고맙게 여긴다.

내 몸체는 단단한 근육질로 되어 있고, 부위에 따라 신맛, 짠맛, 달고 매운맛과 쓴맛까지 오미를 두루 느끼는 기능이 뛰어나다. 또 미뢰(味蕾)라는 작은 돌기들이 촉촉하고 보드라운 혀끝에 무수히 돋아나 입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음식의 맛을 골고루 즐기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이때에도 어금니가 음식을 잘 씹을 수 있도록 몸통을 가능한 민첩하게 굴리는 데 이런 나의 모습은 기계가 자동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과 많이 닮아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언어를 구사할 때에도 자음과 모음으로 말을 만들어 주인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전달해 준다. 그러나 주인은 한 번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고맙다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는 눈치다. 그래도 식사 후 양치질 할 때만은 내 몸을 길게 빼내어 살뜰하게 닦아준다.

오늘은 주인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 돌아왔다.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30분 동안 주인은 차 안에서 한 번도 나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대신 영화음악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노팅힐」을 들으며 여러 갈래의 길을 거쳐 집에 도착한 시간은 산그늘이 설핏 내릴 무렵이었다.

주인과 함께 차에서 내리자 고양이란 녀석이 마루 밑에서 재빠르게 달려 나오며 “야아옹” 인사를 건네고는 이내 땅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제 딴엔 반갑다는 체스추어인데 배를 드러내고 자빠져 있는 모양새가 여간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었다. 주인은 비로소 내게 말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나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래 집 잘 보았느냐?”고 물었고, 주인은 손으로 녀석의 배와 목을 살살 문질러주자 놈은 눈을 지그시 감고 훌라춤을 추듯 허리를 배틀며 애교를 부렸다.

주인은 고양이에게서 손을 거두고 열쇠로 현관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다시 녀석의 행동이 궁금했는지 거실 유리문 앞으로 다가가 목을 길게 빼고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놈은 어느새 현관 앞으로 올라와 혀로 앞발을 핥고 있었다. 필경 두더지나 쥐를 잡아보겠다고 설치고 돌아다니다 털에 달라붙은 풀씨와 티끌을 혓바닥으로 쓸어내는 중이었을 게다. 놈의 혀에는 갈고리처럼 끝이 날카로운 돌기가 돋아나 털에 달라붙은 풀씨나 진드기 같은 벌레들을 제거하기에 적합하도록 진화되었다.

네발가진 포유동물들에게 혀는 먹이를 먹을 때뿐만 아니라 손의 역할까지 감당한다. 제 몸을 다듬는 것은 물론 새끼를 낳으면 새끼들 몸에 묻은 미끄러운 양수도 혀로 깨끗하게 핥아주고 애정 표현도 혀를 이용한다. 새끼들은 어미가 혀로 얼마나 자주 그루밍을 해주는가에 따라서 건강상태와 인지능력 발달에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포유동물이 아닌 파충류들도 먹잇감이 나타나면 가늘고 긴 혀로 재빠르게 낚아챈다. 그들에게 혀는 먹이를 구하는 무기로 쓰이는 것이다.

혀를 이용한 애정 표현은 사람도 동물들과 마찬가지다. 남녀가 만나 최초의 애정 표현은 포옹 다음으로 혀를 이용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나도 첫 키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두려움과 호기심과 짜릿함으로 두 다리가 후들거리던 그 순결한 떨림을.

그런데도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온갖 패설은 다 혀와 입에게로 돌린다. “혀 밑에 도끼가 들었다”느니, “부드러운 혀가 뼈도 깎는다”느니, “혀를 잘 못 놀리는 것보다 차라리 발을 잘 못 디뎌 넘어지는 편이 더 낫다”는 온갖 못된 말은 다 혀가 했다며 모독할 양이면 화가 정수리까지 치솟는다.

입도 나처럼 수난을 겪는다. 사실 입은 내가 말을 만들어 내는 대로 입 밖으로 내 보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입에 재갈을 물리면 목숨을 지키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면 목숨을 잃는다.” “입은 화(禍)의 문이고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말들을 입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러나 이런 말도 사실은 혀가 주인을 잘 못 만났을 때 일어나는 악설이다. 주인이 영적수준이 높으면 자신의 인격이 손상되는 말을 만들지 않는다.

나에게 말을 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곳은 대뇌이다. 그러기 때문에 혀인 우리는 말하기 싫다고 해서 말을 안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란 얘기다.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노래를 불러야 하고 기도를 하라고 하면 주인과 함께 기도의 말을 하느님께 바친다.

나쁜 말, 그러니까 막말을 쓰는 사람들은 의식 수준이 낮은 쪽이다. 그들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언어도 칭찬보다는 흉보기와 험담과 저주하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더러는 지식인들 중에서도 자신의 이익이나 출세를 위해선 혀를 놀려 남을 모함하고 거짓말을 꾸미도록 지시한다. 이런 주인을 만난 혀의 일생은 불행하다. 좋은 말, 희망을 주는 말, 위로가 되는 말과 그리움을 남기는 혀에 비해 그들의 혀는 평생토록 비천한 말로 죄만 짓다가 죽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말이 허공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만일 말에 무게가 있다면 지구는 인간들이 쏟아낸 말의 무게로 진즉에 폭발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무게는 없어도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고, 평생토록 가슴 복판에서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겨 착하게 살아온 혀와 입까지 싸잡혀 악설에 말려드는 것이다.

오늘 나의 주인은 종일 방안에서만 지냈다. 주인이 침묵을 지키면 나는 입안에서 주로 묵상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주인은 지난해부터 감사하는 말을 가장 많이 입에 담는다. 그럴 적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에게 미소를 보낸다.

인간들이여 새해엔 제발 혀를 조심하십시오. 간곡한 부탁입니다.
“ 미련한 자는 입으로 망하고 그 입술에 스스로 옭매인다.”

김 애 자 / 수필가


 

저작권자 © 충북도정소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