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나무가 없으면 어떨까를 가끔 상상한 적이 있다. 생각만해도 살맛이 그냥 없어진다. 방학을 맞아 제일 먼저 경북 영주에 위치한 국립산림치유원을 찾아간 것도 아마 나무를 만나기 위함일 것이다.

오송에서 기차를 타고 풍기역까지는 두 시간이 좋이 소요되는데 기차 창밖으로도 나무와 함께 달리기 때문에 심심치 않다. 이 지구상에 누가 그 많은 나무를 심었을까! 크기도 잎 모양도 향기도 저마다 다른 수 만의 나무들을 생각하느라 잠을 설치거나 나무를 닮고 싶어서 가슴이 시린 적도 많았다. 한 가지 미안한 것은 비탈진 과수원마다 심겨진 과수나무 등이 제 맘대로 가지를 벋지 못하고 오로지 열매가 많이 달리도록 수형을 잡고 팔다리를 비틀어 놓은 것을 만날 때이다.

눈 쌓인 먼 산에 시선을 두자 은빛 나무들의 숲! 수 백 명 신사들이 엄숙히도열하여 기다리는 듯한 자작나무 숲이 가슴 가득 차오르며 설렘을 부추긴다.

이 년 전 여고 동창들과 회갑여행으로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찾아간 일이 있다. 산 정상에서 하얀 파도처럼 다가오는 숲이 보이자 가슴은 뛰었고 웬일인지 어머니 자궁에서 금방 나온 때 한 점 묻지 않은 생명체의 경외를 만난 듯 극적인 백치미를 마주한 것이다.

자작나무를 백화(白樺)라고도 하니 하나하나 꽃 이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 분명한 일이다. 하얀 나무껍질을 얇게 벗겨 내서 불을 붙이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잘 탄다고 해서 자작나무라는 이름이 지어졌는데 유럽의 귀족 백작보다 부족함이 없는 자작의 칭호가 더 합당하지 않은가!

더욱 마음이 끌리는 것은 껍질에 있다. 자작나무 껍질은 흰빛을 띠며 옆으로 얇게 종이처럼 벗겨져서 옛적부터 선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흰 껍질은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였다하니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를 비롯하여 서조도(瑞鳥圖) 등은 자작나무 종류의 껍질에 그린 그림이라 한다. 팔만대장경 목판의 일부도 이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외적인 아름다움에다 내적인 단단함도 지녀 더욱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산림치유원에서 자작나무를 만날 수 있다면 더욱 행운일텐데...... 첫날은 도착하여 저염도 식단으로 점심을 하고 계곡물이 얼어 하얀 얼음 폭포를 이룬 곳에서 이곳저곳 살피며 생활에 지친 연수생들을 치유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추운 겨울이지만 숲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벌써 새 눈이 뾰족이 맺혀있는 버들강아지를 발견하고 얼음 속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물소리에 귀기울이며 봄을 기다리기로 한다.

2016년 9월에 문을 연 국립산림치유원은 여의도 열배 크기로 아쿠아라인 등 건강치유장비를 구비해 심신 상태를 체크해주고 다양한 치유숲길을 마련해 놓았다. 치료가 외부에서 건네는 손길이라면 치유는 내적으로 스스로 위로받아 자아를 사랑하고 살려내는 것이어서 역시 나무로부터 받는 위로를 외면할 수 없다.

다음 날 일출도 맞이할 겸 새벽 어스름에 문을 열고나서니 바람이 차다. 하늘엔 아직 환한 달님이 떠 있고 숙소 위쪽으로 정해진 길을 따라 오르는데 은빛으로 빛나는 자작나무들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이곳에 언제 자작나무를 심어놓은 것인지 자생한 것인지 하얀 달빛 아래 자작나무는 백작 못지않는 자태로 나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자작을 다시 만나다니 이곳에서 나의 새해는 은빛이고 숲이 품어내는 평화에 다시 닿았다.

아침을 든 후 첫 프로그램은 솔향기치유숲길로 갔다. 정월의 첫 해님이 나무 사이를 지나며 숲을 깨우고 있다. 오르는 길에 단풍나무 닮은 고로쇠 나무, 구상나무, 상수리 나무 무엇보다 사오십년 살아온 소나무가 한 아름 굵은 기둥이되어 의연함을 선보이고 있다.

데크길을 따라 더욱 높이 오르자 멀리 ‘사람을 살리는 산’ 소백산 정상 비로봉(1439M)이 하얀 눈을 안고 우뚝하다. 10여 년 전에 다녀간 그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며 감격이 아닐 수 없다.

내려오는 길에 또 서 너그루 자작나무를 볼 수 있었다. 옛사람들은 자작나무를 ‘화(樺)’라 하고 껍질은 ‘화피(樺皮)’라 했는데, ‘화촉을 밝힌다’라는 말도 자작나무에서 온 말이라니 과연 나무의 여왕이다. 나도 다시 태어난다면 한 그루 자작나무가 되고 싶다. 그 빛나는 하얀 몸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초록 바람과 노닐고 싶다. 자작나무의 꽃말처럼 당신을 기다리면서.

박 종 순 / 복대초 교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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