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이론 중에 ‘조하리의 창’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의 모습이 있다. 자신도 알고 타인도 아는 ‘열린 창’, 자신은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숨겨진 창’,  나는 모르지만 타인은 아는 ‘보이지 않는 창’,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 창’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이론은 실제생활에서도 꽤 유용하다. 일단 자신에 대해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물론 타인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지, 타인의 모습 중에 미처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점검한다면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갈등, 내적고민도 조금은 해결될 것이다.

미국의 소설가였던 마크 트웨인(1835~1910)은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조하리의 창’이라는 이론처럼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또한 사람은 평면적이기 보다 입체적인 존재에 가깝고 아는 부분보다 모르는 부분이 많을 수 있다.

정육면체를 예로 들면 한 번에 볼 수 있는 면은 3개가 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6개의 면 중에 볼 수 있는 3개의 면이 흰색이고, 볼 수 없는 면이 검정색이라면 우리는 보이는 그대로 흰색의 정육면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대상의 일부분만을 보고 확실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에는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곤경에 빠지기 쉽다.

몇 해 전 방영되었던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에서는 우리가 기존에 알던 세종대왕과는 다른 면모의 캐릭터를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위인전기에서 읽었던 고정된 이미지, 즉 백성을 위하는 헌신적인 군주만의 모습이 아니어서 더욱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왕이지만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시원하게 욕도 하고 신하들과 수더분하게 농담 따먹기도 하며 한글을 창제하기 위해 저항하는 기존 세력의 갖은 모략과 권모술수에 대응하고 고뇌도 하는 등 입체적이고 독창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을 연기한 배우의 열연도 있었지만 극본을 쓴 작가는 모든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다양한 모습들이 있다라는 것을 전해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익숙한 이름에는 ‘익숙하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있고 우리는 그 이미지의 틀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앞서 언급된 세종대왕 뿐만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 원효대사, 안중근 의사 등을 떠올리면 익숙한 이미지만으로 전체를 생각하게 되지 않던가? 가령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 장군의 의연한 모습,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길을 포기한 원효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안중근 의사의 용감한 모습들 말이다. 위인들의 역사적 성과와는 별개로 각 인물들이 다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것, 우리를 둘러 싼 인간에 대한 심오한 고찰은 역사 뿐만이 아니라 삶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다양성은 문화재에도 해당한다. 충북에서 알려진 가장 유명한 문화재를 꼽으라면 단언컨대 ‘직지심체요절’인데 지금은 멀리 프랑스의 국립도서관 단독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 곁에서 가깝게 볼 수 없지만 직지가 남긴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라는 타이틀의 이면에 지식을 나누고 후대에 전달하고자 했던 고귀한 마음을 생각해본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뿐만 아니라 삶이나 사람을 대할 때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 다른 생각들이 많아 다행이다. 각자의 다른 모습과 생각을 더 많이 응원해주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이 기 수 / 충청북도SNS서포터즈

저작권자 © 충북도정소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