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줄이다. 삭풍이 몰아치던 그 날, 눈을 들면 날아갈 듯 경쾌한 늴리리야 지붕과 솟을대문이 척 어울리던 기와집 한 채. 바람이 지나가는 대로 땡그랑 땡그랑 풍경이 울리는데 문득 보니 서까래 밑으로 사뿐 드리워진 끈 한 가닥. 마루에 오르내릴 때마다 잡고 의지하라고 매달아 놓았을까. 모르기는 해도 연세가 높거나 어지럼증이 있는 노인들을 위하여 짐짓 설치했을 것 같은 이름마저 예쁜 드림줄.

기와집 마루에서 바라 본 한 컷 스케치는 그렇게 이색적이었다. 지금은 보기도 힘든, 참으로 고풍스러웠던 그 집, 마당에는 돌절구가 덩그러니 놓였고 행랑채 쪽으로는 외양간이다. 나무로 만든 여물통 구유가 있는가 하면 크고 작은 항아리가 수없이 늘어선 장독을 보니 한겨울 추위도 누그러지는 느낌. 맛깔스럽게 먹은 전통 한식보다 미닫이문을 들어가면서 본 드림줄의 의미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

모두들 장난스럽게 잡고 올라가면서 아련히 향수에 젖어 본 시간이었다. 서까래 매단 드림줄은 노인이 있는 집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연로하신 분들을 위한 도구였으나 공들여 만든 누군가도 언젠가는 줄을 잡지 않고서는 댓돌 밖으로 나가기 힘든 나이가 된다. 어쩌다 대물림도 하게 되는 특별한 줄이다.

하기야 그래서 더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주로 삼을 꼬아서, 어떤 집에서는 창호지를 가늘게 꼰 뒤 땋아서 만들기도 했다. 줄은 또 새끼줄보다 굵어서 댕기머리처럼 세 겹으로 땋아 드리웠으니 튼튼하기가 쇠심줄 같았을 것이다. 오래 전 이 집에 살던 사람 모두는 딱히 노약자가 아니어도 습관적으로 잡고 오르내렸을 테지만 나중에는 그들에게도 필수품이 되었을 터. 높은 마루를 쉽게 오르내리고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아주는 식으로 대청뿐 아니라 방 문설주 적당한 곳에도 매달아 예방책으로 삼았겠지.

드림줄은 건강 차원도 되지만 은연 중 기댈 수 있는 배경이었다. 내 인생의 드림줄은 또 뭘까 싶은 생각 때문이다. 우리 또한 그로써 삶의 격을 높일 수 있다면 그만치 중요하다. 크게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고 딱히 어지럽거나 한 건 아니었으되 삶을 지탱해 줄 뭔가는 있어야 될 것 같다. 돌아보니 우리 모두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기대 온 드림줄, 부모님이 있고 좀 더 자라 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선생님께 배우고 의지하면서 지식과 소양을 쌓아 왔다. 내 인생 제 2의 드림줄 역시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선생님은 앞으로의 희망을 써 내라고 하셨다. 나는 별다른 뜻도 없이 동화작가가 되겠다고 적어 냈다. 동화작가라니 생각하면 가당치 않은 꿈이었는데 선생님은 잘 썼다고 앞에 나와서 읽게 하신 뒤 작가수업을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나름 작가 수업을 한답시고 읽은 책은 더없이 소중했다. 특별히 ‘생활은 소박하게 꿈은 높게’라는 글귀도 버릴 수 없는 좌우명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꿈과 이상은 내 삶의 반경에서 무지개처럼 빛나곤 헸으니까.

최근 들어 시력이 나빠지기는 했으나 책을 읽으면 생각이 깊어진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잠시도 게을리 할 수가 없다. 세상 모든 책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아도 필요한 것은 들어 있을 테니 삶의 자양분으로 충분하다. 읽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공유하는 건 물론 읽은 만큼 멀리 볼 수 있으니 안목도 넓어질 수밖에. 내 삶의 현주소가 황무지처럼 보일 때는 막막하지만 폐허 속애서도 꽃은 핀다.‘그래, 꽃밭이 아니면 어떄. 잡초 속에서도 곱게 보일 때가 있거든?’ 라고 하면서 용기를 얻곤 했다.

힘들 때는 감명 깊게 읽은 말이 불쑥 튀어 나와 수호신처럼 지키며 따라다녔다. 넘어질 때도 손을 잡아 이끌며 토닥여 주었다, 책을 보다가 ‘맞아. 그랬지’ 라고 무심결에 끄덕이며 감동을 받은 내용이 이따금 내 삶의 칠판에 빼곡히 채워지기도 했다. 비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던 수많은 글귀. 지워지기는커녕 천둥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더욱 또렷하게 비치던 기억. 그럴 때마다 까닭 모르게 흐벅진 느낌이었는데. 허구한 날 곡절에도 여전 남아 있는 글귀가 인생의 후미를 촉촉 적셔줄 때도 사뭇 설레곤 했지. 인생의 드림줄로 그만치 예쁘고 아름다운 게 또 있으랴 싶을 정도로.

살다 보니 늘 다양하게 나타나던 드림줄. 앞으로 내 삶에 또 어떤 드림줄이 드리워질지도 미지수나 지금까지의 드림줄 못지않게 소중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혹간 믿는 나무에 곰이 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삶의 버팀이기는 해도 별다른 생각 없이 의지했다가 뜻밖의 불상사로 이어진다면 든든하고 어기찬 의미와 어긋나게 된다. 무게를 실은 채 넘어지면 더욱 위험할 테고 그래 두 겹 세 겹 꼬아 만든 것처럼, 굵기와 길이가 다양한 중에도 튼튼해야 된다는 사실은 바뀔 수 없는 특유의 배경.

살면서 기대고 의지할 뭔가는 필요하고 따라서 중요하기는 해도 깊이 새겨두지 않으면 오히려 무색해지고 만다. 이제는 평소 기억해 왔던 좋은 글귀라 해도 시류에 따른 점검이 필요할 때라는 생각. 문지방을 넘고 마루에 올라설 때 특별히 안전하다는 줄도 은연 중 삭을 수 있고 그냥 끊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잘못된 가치관으로 인한 문제의 단속도 필요하다. 드림줄은 그 외에도 많을 것이나, 더 굵고 튼튼한 줄을 걸어 두면서 알차고 내실 있는 삶을 추구해야겠다는 뜻.

줄을 매 둔 못도 종종 살펴야 하는 게, 줄은 만약을 위해 튼튼히 엮었을지언정 못은 녹슬기라도 할 경우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평소 믿고 기대기는 해도 그에 대한 점검은 자신의 몫이었거늘. 항해를 할 때 필요한 것은 지도와 나침반 등이고 인생 역시 그 과정이라면 독서를 통한 지표와 살 동안 체득한 이념을 적절 활용하는 것은 자기 역량이다. 오랜 날 다져온 의지로 밀림같이 빽빽한 삶의 지도까지 그릴 수 있게 될지언정 그럴수록 돌다리를 건너듯 조심해야겠지. 아울러 곡절을 극복해 온 지혜 역시 나름 건재하다면 남은 항해도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우리 삶의 드림줄은 자신의 몫이었고 인생의 마지막도 그로써 충분히 아름다워질 테니까.

이 정 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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