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동지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윤달이 드는 바람에 음력이 예년보다 훨씬 늦지만 동짓날이 되면 올해도 예의 팥죽을 쑬 생각이다. 일단 팥을 삶아 체에 밭친 뒤 뭉근한 불에 올리고 찹쌀가루 반죽으로 옹심이를 만들곤 했다. 얼추 만들다 보면 옹달솥에서 설설 끓어나던 팥물이 참 정겨웠는데, 젓고 나면 쌀알이 먹기 좋게 부드러워졌다. 한 상 차려 먹을 것도 잊은 채 물끄럼 보노라면 그럴 때마다 박꽃처럼 뽀얗게 떠오르던 옹심이.

동짓날이면 팥죽을 쑤시던 어머니가 그립고 불현듯 짠해 오던 기억. 우리 자매도 옆에서 팥을 으깨고 새알심을 빚곤 했었다. 만들면서 언니들은 옹심이라고 했고 동생들 몇몇은 새알심이라고 우겼다. 동글동글 빚은 찹쌀반죽은 천연 산새알 같아서 예쁘장한 이미지 딱 그대로다. 오목한 모양 때문에 옹심이라는 말도 꽤나 그럴듯하고 그래서 이따금 새알옹심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누군지 모르지만, 새알심이든 옹심이든 똑같이 앙증맞고 예쁘다는 생각으로 한 가지 이름만 지어 붙이는 게 아쉬웠을까.

새알심이든 옹심이든 다를 게 없건만 새알심은 이를테면 철부지 어릴 때 끌린 말이었으되 나름 세상 쓴 맛을 알고 난 지금은 옹심이가 정겹다. 옹알이도 이가 나기 전 오목한 입속말이라 더 그런 이미지고 바로 그 새알옹심이 팥죽을 옹배기에 담아 먹었다. 옹배기라고 하니 덩달아 오목한 느낌. 동지 팥죽 옹심이도 먹다 보면 옷자락에 튀기 일쑤고 그래서 넓적 대접과는 달리 앙바틈한 그릇이었겠지. 팥죽 또한 액막이를 위한 풍습이었던 것처럼. 익반죽한 찹쌀가루를 새알모양으로 빚은 새알심 역시 나이만큼 먹었다. 귀여운 이름은 차치하고라도 특별히 팥죽 한 그릇 먹어야 묵은해가 간다니……

어머니가 팥죽을 안치는 것은 옹달솥이었다. 부엌 초입에는 가마솥이 있고 다음에는 중간 솥 그리고 옹달솥은 훨씬 작지만 밥은 물론 찌개를 안칠 때도 알맞추 좋았는데 동짓날 특별히 팥죽을 쑬 때도 그 솥이다. 그 날은 우리도 집안 일을 도와 드렸다. 여느 때는 자치기니 사방치기에 팔려 해 지는 줄도 몰랐으나 동짓날은 심부름 한답시고 물을 길러 갔다. 동네 한복판 옹달샘은 물이라야 열 말 가웃이다. 여름에는 땀이 식을 만치 차가워도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초상이 나면 뚜껑을 해 덮고 비가 오면 흙물을 퍼낼 정도로 중요시했던 마을 사람들. 정갈한 물로 쑤었으니 새알옹심이도 유다른 맛이었던 것.

팥은 이뇨작용이 뛰어나고 변비에도 좋은 식품이다. 사포닌과 철분 비타민이 풍부한 건 물론 팥 껍질은 장 운동을 돕고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 극심한 흉년에는 논 한 마지기와 팥죽 한 동이를 바꿔먹기도 했단다. 어릴 적, 전래동화에 나오는 호랑이가 “팥죽 한 그릇 주면 안 잡아 먹지” 라고 기세등등 능갈칠 정도의 별식이다. 특별히 2017년 올해는 음력으로 11월 5일 즉 동짓달 초순에 든 애동지다.

동지는 대부분 양력 12월 21일 또는 22일이에 드는데 음력으로 11월 초순에 들 경우는 애동지라고 했던 바 그 때는 어린아이가, 중동지에는 또 청년과 장년, 노동지에는 노년층이 많이 죽는다는 속설도 전한다. 그래 올 같은 애동지에는 팥죽 대신 팥시루떡과 팥밥을 먹었다니 의료시설이 열악했던 시절 건강을 위해 삼가는 모습이라면 오히려 친근하다.

동지가 지나 겨울도 깊어지면 도토리묵이 나온다. 산골이었던 우리 동네는 도토리가 흔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어머니는 앙금을 내서 묵을 쑤고는 곱게 채 썰어 팥죽을 먹을 때처럼 옹배기에 담았다. 고명으로는 노랗게 삭은 집고추 양념장을 얹었다. 흙으로 빚은 까닭에 독성까지 제거한다니 세련되지 않아도 투박한 모양에 끌렸다. 그 외에 옹방구리가 있는데,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한다는 말처럼 방구리는 밀가루 풀을 담는 그릇이다. 옹방구리는 또 ‘옹’자가 붙었으니 당연히 작고 비슷하게 생긴 옹배기도 막사발같이 작은 그릇이었으며 주로 칼국수와 메밀묵을 담을 때 쓴다.

눈 감으면 아련히 들리던 동네 가운데 옹달샘 물 소리. 둘레를 따라가 보면 옹벽이 처져 있었지. 마을이 생기면서 솟아났을 것 같은 샘, 오래 전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던 자취는 희미해졌으나 이중으로 쌓은 옹벽에 곰삭은 세월이 흩어진 것 또한 고답적이다. 곡식도 잘 영글면 옹골차다. 매듭도 단단히 묶을 때는 옹쳐 맨다고 표현한다. 작고 오목한 옹달시루와 물 긷는 옹동이도 있거니와 토압에 견디도록 만든 게 옹벽이라면 단단하고 야무진 뉘앙스다. 이해심이 적고 생각이 짧으면 옹졸하다지만 깊이가 있고 야무진 게 일반적 견해다. 나도 약간은 옹고집이었나 싶지만.

옹달샘 옆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도 생각난다. 두텁떡처럼 뒤덮인 비늘줄기에는 드문드문 옹이가 패였다. 바람에 꺾인 가지가 아물면서 그럴 때마다 옹이로 불거졌겠지. 툭하면 부러지는 소나무는 빤할 틈이 없으나 나무는 모름지기 그렇게 자란다. 생채기 때문에 유달리 더디 크고 우툴두툴 볼썽사나워도 불을 때면 훨씬 꼬다케 타고 화력이 세다. 옹이는 꺾인 가지를 붙여주는 이음매였으되 상처가 아문 부위라서 그리 다부졌을 것 같은데.

‘옹’ 자 특유의 이미지로 보는 송년의 단상이 오래 전 샘가 옹벽의 이끼처럼 되살아난다. 저무는 한 해가 아쉬운 중에도 동지 때는 특별히 푸성귀까지 새 마음 든다. 동짓날이 따뜻하면 전염병이 자주 돌고 눈이 푸짐하게 내릴 때는 풍년이 들 징조였거늘 근자에 계속되는 추위를 볼 때 탈은 없을 듯하다. 절기에 따른 변화를 보고 날씨를 추정하는 건 물론 웬만치 맞아떨어지는 것도 별나다. 해마다 구수한 팥죽과 고명으로 넣은 옹심이를 먹고 난 뒤의 기분이었는지 몰라도.

갑자기 높바람에 창문이 덜컹덜컹 야단스럽다. 새알심 옹심이로 이어지는 한 해 단상도 수수롭거늘 동지가 지나 얼마 후에는 또 봄이라고도 했다. 이제부터가 겨울인데 싶다가도 불현듯 설레는 마음. 이제 동지를 기점으로 해가 노루꼬리만큼씩 길어진다면 봄도 과히 멀지는 않다.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 짚고 5 리는 더 간다고 할 정도였으니 소망이 따로 없다. 시차적으로도 낮이 점점 길어지기 때문에 작은설이라 불러 왔고 그만치 예쁜 말이다. 아직은 쌀랑해도 동지가 가면 추위도 한풀 꺾인다 하듯 올 겨울도 그렇게 극복하고 싶다. 다가오는 무술년 새해 역시 옹골찬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한 해를 접는 끝자락에서………

이 정 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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