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민 장군 영정을 모신 괴산 충민사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가장 많이 읽은 위인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세종대왕, 안중근 장군, 김구선생 등 여러 인물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국난극복의 상징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시대에 따라 위인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도는 바뀐다고 하지만 아직도 이순신장군만큼은 인기가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더 많아지고 있다고 봐야할까. 대표적으로 영화만 봐도 그렇다. 역대 영화관객수 순위 1위에 오른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소재로 하여 약 일천 칠백만 명이 관람했다. 국민 세 명 중 한 명이 본 국민영화인 셈이다.

전쟁의 위기 속에 뛰어난 지략과 전술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이야기에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해상으로의 진입을 막은 덕분에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호남을 구했고, 파죽지세로 들이닥치던 일제의 병력과 보급을 조기에 막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이 오기까지 다시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왜군을 무찌르지 않았다면 전쟁도 패하고 어쩌면 일제강점기가 더 일찍 찾아오진 않았을까 무서운 상상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충무공’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그런데 조선 역사상 충무공은 2명이 있었다. 정확하게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이순신 장군과 김시민 장군이 받은 시호라는 얘기다. 바다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으로 임진왜란의 3대첩과도 관련이 있다.

3대첩이란 먼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선을 전멸시킨 ‘한산도대첩’이 있으며 다음으로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쳐부수어 승리한 ‘행주대첩’, 마지막으로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한 ‘진주대첩’을 말한다.

진주는 당시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이었으며 왜군들을 방어하는 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진주대첩은 약 삼천 팔백여명의 조선군과 일반 양민들이 합심하여 왜군 약 3만 명을 크게 무찌른 전투다. 또한 곽재우를 중심으로 한 의병들의 가담으로 무너진 중앙군과 지방군의 역할을 의병들이 톡톡히 했던 전투이기도 하다.
 
만약 이때 왜군을 막지 못했다면 남은 경상도지역과 전라도 지역을 보존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워 약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막아냈지만 안타깝게도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준 김시민 장군은 이마에 총상을 입어 39세를 일기로 전사하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 김시민 장군에게는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진다.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백성들이 왜군들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얻게 된 계기였다고 평가 받는다.

충북 괴산의 충민사는 조선 선조 때 건립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과 충숙공 깁제갑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내던진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순국선열들의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충무공’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만을 떠올렸는데 이제 김시민 장군도 함께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괴산에 들를 일이 있다면 충민사에 들러도 좋을 것이다.

이 기 수 / 충청북도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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