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 제198호 ‘단양 적성비’

문화재를 보러 가면 가장 먼저 보는 것 중에 하나가 ‘비석’이다. 비석은 제작될 때는 사건 당시 또는 그와 가까운 시기에 기록되기 때문에 역사학, 문자학, 서예 등 여러 분야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며 비석의 구조와 양식은 미술사의 자료로, 비에 새겨진 내용은 주변국과의 관계나 비석을 제작한 연대를 추측할 수 있으므로 사적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삼국이 가장 치열하게 빼앗고 빼앗기던 지역 중 하나인 충청북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개의 비석을 품고 있다. 먼저 국보 제205호인 ‘중원 고구려비’다. 공식명칭은 ‘충주 고구려비’라고 하지만 삼국시대 충주의 옛 지명이 ‘중원’이기 때문에 ‘중원 고구려비’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더 알려져 있다. 실제 원본은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비석은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구려시대의 비석으로 존재만으로도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 받는다.

비문의 내용을 알고 나면 더욱 흥미롭다. 앞면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사이좋게 지내던 시기의 일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빠져 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해 고구려에 대항한 내용이 있다. 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가 한강 상류인 이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며 남방 진출의 거점이 될 충주에 기념비를 세운 것이라 추정한다. 고구려의 위세가 얼마나 위협적이었으면 백제와 신라가 오랫동안 동맹을 맺었을까? 다른 얘기로 지금은 중국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에는 고구려가 대군을 파견해 신라를 침공한 왜군을 격퇴했다는 내용이 있다. 국내외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구려비석 외에도 충북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삼국시대 비석이 있다. 바로 국보 제198호인 ‘단양 적성비’다. 단양적성비는 백여 년간 고구려 영토였던 충북 단양 지역을 신라의 진흥왕 시대에 차지한 후에 원래 지역에 살던 백성들을 포섭하기 위해 제작한 비석이라고 한다. 발견과 관련된 일화도 흥미롭다. 지역에 학술조사를 왔던 일행이 우연하게 돌부리에 신발 흙을 털어내려다가 돌에 새겨진 대(大)라는 글자를 보고 발견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긴 시간 땅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중원 고구려비와 달리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없다고 한다. 단 윗부분이 파손되어 전체 내용 파악에는 무리가 있다.

이 비의 내용도 흥미롭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이라는 노래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이사부 장군을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하고 난 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담으로 이사부는 울릉도를 신라 땅으로 만든 장수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신라 영역확장의 주역이자 일등공신이다. 후에 대가야를 정복하는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충청북도가 예로부터 대단한 요충지였다는 것은 중원 고구려비와 단양 적성비라는 비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동북아의 강자였던 고구려의 위세와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였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던 힘이 충청북도 지역을 차지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바람에도 일천 오백년을 넘게 서있는 비석을 보며 다가올 미래의 희망과 충청북도의 비상을 아로새겨 본다.

이 기 수 / 충청북도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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