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울음

갈대밭 풍경이 왜 그렇게 어색한 걸까. 모처럼 따스한 오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다.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흩어져 있고 때때로 날아드는 철새가 목가적인데 갈대밭 언저리만 겉돈다. 늘 보는 갈대밭이고 냇가의 풍경 또한 달라진 게 없다. 아무리 봐도 바람이 불지 않는 맑은 날씨 때문이라는 생각. 딱히 달라진 것은 없어도 그래서 더 낯선 느낌이라니.

하지만 뒤미처 바람과 함께 풍경은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의 무료했던 기분은 간 곳 없이 가을의 바탕화면에 잿빛으로 벙근 갈꽃이 새삼스럽게 예쁘다. 짐작이 맞아 떨어졌다 싶은 게, 썰렁한 늦가을이 한결 푸근해진다. 둔덕에 서서 기러기를 배웅하던 갈대가 은연 중 전해 오는 메시지, 초가을부터 쟁여 온 곡절이 한 컷 필름으로 스쳐 가는데 날씨가 맑을 때는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선 듯 그렇게나 답답했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계절병을 치르면서 몸살을 앓곤 했던 갈대밭 여운이 잠시 전과는 달리 또렷하게 들려왔건만.

갈대밭에는 모름지기 바람이 둥지 틀어야 어울리는 것 같다. 모처럼 시달리지 않아서 편하겠다고 했더니 분위기가 뜻밖에 묘했던 기억. 바람 부는 길목에서의 춤사위가 편했던 걸까. 뿌리박은 곳은 저수지 아래뜸 질컥이는 늪이었으나 가을이면 바이올렛 톤 메시지를 베껴 적는다. 거센 바람의 효과음으로 돋보이던 갈대밭 연가. 바람을 껴안고 사는 운명이라고나 하듯 그렇게.

솔직히 닿기만 해도 꺾일 것처럼 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핏하면 바람이라니 그래서 속으로만 울었나 보다. 끝내는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견디는 과정을 삶의 공식으로 정했을 테지. 태풍이 지나가야 소나기 걷힌 하늘을 볼 수 있다며 안개 빛 여울을 헤쳐 나간다. 뿌리는 줄곧 흔들리고 뿌리는 또 가슴으로 이어져 눈물겨운 시나위를 펼친다. 파도치는 바닷가 바위처럼 갈대밭 언덕에는 바람이 진을 치듯 머물렀다. 근방에만 가도 아련한 속울음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도 그 때문이었을까 싶지만.

뿌리박는 곳마다 바람이기는 했어도 더 빨리 누워야 꺾이지 않는다고 넘어지는 대로 일어나면서 내성을 키운다. 바람이 불어야 강한 풀의 존재가 드러나듯 운명의 강도로 의지를 시험하는 어기찬 일대기. 심술이나 부리듯 더 세게 불 때도 묵묵히 숙이기만 하는 갈대밭 속울음. 바람과 갈대의 끈끈힌 인연, 바늘과 실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그대로다. 갈대가 있으면 거기 으레 둥지 틀던 바람. 보푸라기 같은 잎은 또 끝없이 흩날렸거늘.

샛바람에서 마파람 하늬바람 높바람까지 차곡차곡 재우다 보면 습관적으로 넘어지곤 한다. 넘어진다 해도 언젠가는 일어날 각오로 견디지만 처음에는 당연히 피했을 것이다. 기미를 알아챈 바람은 또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았을 테고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갈대밭의 고요. 기껏해야 산들바람 정도에 경쾌한 리듬은 가을 이미지 여전했으나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꺾이는 걸 보고 약간은 불안해졌을 것이다.

바람의 태형을 견디면서 넘어지지 않는다는 걸 생각했겠지. 바람이 빠져나간 무덤 속 같은 고요가 특별히 더 힘들었을 것이다. 바람은 갈대의 천형이었던가 싶다가도 그렇게 자라는 거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숙연했다. 바람으로써만 존재의미가 드러나는 갈대밭 침묵이 스쳐간다. 바람을 맞으며 속내를 채우는 것도 힘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속에서 견디는 외로움은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곡절이 많은 삶은 힘들지만 곡절이 없는 삶은 때로 무료할 것도 같은 기분과 어지간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바람을 일구기 시작했을 속내가 그려진다.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바람의 교향곡을 연주해 왔다. 참다못해 터뜨린 속울음이 갈대밭 어름에 공명이 되면서 축축한 바람으로 불어갈 때는 힘든 중에도 잘 견디었다고 했을까. 밖에서 들이칠 때는 가을 특유의 메마른 바람이되 스스로 일군 바람은 눈물에 젖은 듯 촉촉했을 것이다. 이맘때면 갈대밭을 찾곤 하던 나 역시 춥다고 옹송거리지만 가을바람의 성근 느낌이 싫지만은 않다.

힘들기는 해도 바람이 아니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몸부림을 삶의 한 자락에 끼워 둔다면 삶 역시 가을처럼 고즈넉해지련만. 바람 불어 썰렁한 날도 스카프를 매고 바바리 깃 세우고 다닐 때는 가을여자나 된 것처럼 설레곤 했었지. 바람이 거미줄 치는 언덕에서 갈대를 키울 수 있었던 바람의 속내를 돌아보며 속울음을 쟁여둔다. 어느 글귀에서처럼 나를 키운 것도 생각하면 삶의 소용돌이였던 운명인 것을. 굽이굽이 여울을 헤쳐 나갈 동안 그토록 피하고 싶었는데도……

문득 보니 또 다시 시작되는 바람의 행진곡. 넘어뜨리기는 해도 일어날 여지는 남길 줄 아는 속내가 그려진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끝없이 흔들리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더도 덜도 말고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주어지는 바람의 탄력성을 삶의 공식에 대입해 본다. 갈대가 흔들릴 때마다 덩달아 리듬을 타면서 풀을 키우는 것처럼 그렇게. 이물질이 들어오면서 영롱한 보석을 새기는 진주조개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특유의 메시지를 받아 적는 모종의 추억.

바람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그들처럼 우리 또한 태풍이 몰아치는 길목에서 운명을 극복해 나간다. 바람을 피하고는 단단해질 수 없다면서. 울리려는 사람이라면 더 활짝 웃어 보이듯 넘어뜨리는 바람이라 보란 듯 일어났을 테지. 필연인지 몰라도 ‘그래, 시련은 기피하는 게 아니었어. 바람을 맞고 사는 것처럼 운명에 시달릴 동안 자기 삶의 나이테를 새기는 거야’라고나 하듯 기울어진 만큼 일어나고 빈 가슴을 채울 때마다 단단해지던 줄기.

바람을 삭제한 갈대밭의 고요가 때로 숨이 멎을 정도라면 곡절이 많은 삶도 수긍이 간다. 하루 이틀은 평온한 느낌이었으나 계속되면 그렇게 답답한 풍경은 드물 거라는 갈대밭 메시지. 연한 줄기로 맞서다간 언제 꺾일지 몰라 바람이 부는 대로 넘어지면서 속으로 느껴 울던 갈밭의 휴식. 바람만이 마지막 남은 몫이라며 언덕을 버르집던 모습이 어쩌다 꿈결처럼 아련해 온다. 바람이 없는 갈대는 생각할 수 없다는 갈대밭 연가를, 시련을 빼고서는 생각하기 힘든 내 삶의 오선지에 다시금 적어본 하루다.

이 정 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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