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년 作

 `나는 위대한 예술가인 것을 내가 잘 안다’ 고갱의 말이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말 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요즘도 ‘나는 위대 할 거야’ 를 믿고 열심히 노력하다 쓰러지는 자도 있고, 결국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고갱은 노력하고 몸부림치기를 55년...
결국 쓰러진 마지막에 고갱은 아내에게 쓴 편지에 “훗날 사람들이 나의 예술을 열린 눈으로 바라봐 주는 날, 나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이 진흙탕 속에서 일으켜 줄거요” 라고 말했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몸부림치며 남긴 마지막 유언인 셈이다 .

고갱이 세잔느, 고흐와 함께 근대 미술의 효시로 불을 밝힌 3대 작가임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의 업적은 고흐와 세잔에 비해 다소 열세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보다도 고갱은 가장 치열하고 가장 능동적이게 확신에 찬 활동으로 근대미술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확실한 외침으로 창의적이며 뚜렷한 개성을 드러낸 작가임은 분명하다.

그가 24살 때였던 1872년 주식중개인으로 결혼도 정상적으로 했고 10년간 다복한 가정도 꾸렸다.

10년이 지나고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예술가의 길은 어마어마한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지금까지 하던 일과 물질적 풍요, 사회적 지위, 무엇보다도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멀리하고 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마흔이 되던 1888년 그는 브르타뉴라는 미개발지역으로 찾아가 퐁타방파라고 부르는 현대미술의 확실한 창의적 이론을 수립하고 깃발을 높이 들었다. 20세기 요즘 만연한 그림의 형태인 상상의 세계와 일반 시각적 표현을 벗어난 명암무시 원근무시 등의 상징주의 개념주의 세계가 너무 일찍 퐁타방에서 구현된다. 그러나 그 당시엔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1891년 그의 나이 43세, 그는 문명을 벗어난 더욱 원초적인 자연과 원주민을 찾아 남태평양 타이티로 간다. 그가 그 곳에 철저하게 동화되고자 노력하고, 환상과 꿈의 세계로 몰입하는 동안 유럽에 남겨진 그의 외동딸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또한 병마와 싸우게 되는데, 그 때 그 유명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가 탄생 된다. 그리고, 그는 1903년 5월 8일 열대지방에서 브르타뉴의 겨울풍경을 그리다 눈을 감는다.

고갱은 100년 후 자신의 사고와 너무나 닮은 미술세계가 펼쳐질 것이란걸 알았을까? 몰랐을까?

이세훈 / 전 한국미술협회 충청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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