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서 가을을 캐다

드넓은 예당평야는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다. 30분쯤 갔을까, 먼 산자락 드러나는 눈썹 같은 지평선. 드문드문 허수아비는 금물결 젓는 사공 같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벼이삭에 층층 가르마가 트이고 목가적 풍경이 찬란하다. 한들한들 코스모스와 둔덕의 수많은 억새, 작은 비행기처럼 끝없이 떠오르던 고추잠자리.

가을이면 들녘에 바다가 생긴다. 멀리 수평선과 파도는 없지만 벼가 익을 때는 금빛으로 물든 아침 바다 풍경과 어지간하다. 초록이 빠져나간 뒤 금물결로 차오르던 아득히 들녘을 보니 해루질이 생각난다. 지금은 또 일 년 중 가장 달 밝은 팔월 보름께. 보름달이야 언제든 밝지만 밤중에도 불 밝혀 잡는 해루질 때문인지 추석을 직역할 때의 ‘가을 저녁’도 달 밝은 가을 밤이라는 뜻이 강했다. 일 년을 통틀어 가장 물때 좋은 게 바로 추석을 전후한 지금이었으니까.

그게 곧 물 빠진 갯벌에서 어패류를 잡는 거라면 초록물 뺀 가을도 거둘 일만 남았다. 추석에는 들판도 으레 썰물이 지고 거기서 나온 햇과일 햇곡식으로 차례를 지낸다. 야들야들 햇밤과 살짝 붉은 대추도 초록물 빠진 뒤의 일이다. 금싸라기 깻잎과 새파랗게 튀는 녹두알도 그 즈음부터 결이 삭고 익는다. 산 다랑치 비탈밭, 무논에서도 썰물이 졌으니 갯벌에서처럼 동부와 두렁콩을 따고 올벼도 거둘 수 있겠다. 가을을 캐는 해루질 물때로서는 최고 좋은 시점이었던 것.

이따금 보면 바닷가의 해돋이 같다. 어쩌다 태양이 구슬을 잔뜩 산란해 놓던 그 풍경. 수평선이 물들기 시작하면서 금빛물결에 떠오르던 해오름 속의 갈매기. 그럴 때는 벌써 눈으로 해루질하는 기분이었다. 바닷가의 어부들처럼 캐고 줍는 건 아니었으나 물때를 기다리듯 밤새 기다렸다. 진흙 뻘에서의 조개잡이 같은 게 해루질이라면 금빛바다는 어둠이 빠진 뒤 드러난 진풍경이다. 직접 잡지 않고 눈으로 완상하는 경우도 있었던 만큼.

들판의 금물결 역시 벌레만 생겨도 노심초사 이파리 한 개만 시들어도 거름과 퇴비를 주면서 이룬 결과다. 한편에서는 땀땀 수를 놓고 더러는 모듬모듬 휘갑치면서 훨씬 더 예쁘장한 깔로 드러난 가을 풍경화. 곳곳에 묻어나는 만추의 서정은 생각만 해도 고즈넉한 느낌이고 곳곳에 드러난 조락의 이미지도 아름다웠다. 낙엽은 쓸쓸해도 밑단을 들추면 철새가 날아가고 기러기 발 사이로 청옥색 하늘도 좋았다. 유달리 푸른 빛깔에 눈을 들면 멀리 감나무 한 그루. 잎은 다 떨어졌어도 붉은 감이 등잔처럼 빛나던 이삭 같은 풍경 한자락.

가랑비까지 철 적게 뿌리는, 그런 날 둔덕의 마가목 가지는 붉은 열매로 가득했다. 예쁘다고 완상해 볼 겨를도 없이 금방 초겨울이고 연습이나 하듯 풀풀 날리던 서설. 눈 속에도 푸른 잎과 예쁜 꽃이 둥지 틀 것을 생각하면 높바람도 일없다. 아무리 추워도 봄을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눈 속에서도 꽃을 돋우고 잎을 새기는 겨울. 겨우내 함박눈도 은빛 물결이었으니 봄도 물때를 맞춰 온다. 쌓인 눈은 떡쌀을 뿌린 듯 곱지만 녹은 뒤에는 뻘같이 진흙치레다. 그렇게 퍼올린 마중물을 필두로 꽃을 피우고 새싹을 틔우는 봄도 비슷한 모양새다.

새싹 트는 봄 들머리에도 초록을 준비하는 여름 척후병이 있었다. 그 때부터 차오르던 물살이 8월의 녹음으로 범람하면서 지금 보는 풍경을 연출했겠지. 계절의 간이역에도 늪지대는 있었던 것이다. 가랑잎 날리는 초겨울과 눈 녹아 질컥이는 초봄 또한 어수선해도 언젠가는 수많은 어패류를 캘 수 있는 갯벌이다. 추석을 전후할 즈음에는 특별히 어린애도 돌만 뒤집으면 낙지를 잡을 수 있다고 하니 뭍에서든 바다에서든 어디라 할 것 없이 물때 좋은 계절 그대로다.

언젠가 물 빠진 서해안에서 조개를 잡던 날의 기억 하나. 꽃게를 파내면 저만치 쭈꾸미가 보였다. 허둥지둥 달려가면 손이고 뭐고 개흙치레가 되었으나 한 마리 두 마리 늘어나는 게 딴에는 재미있었다. 그나마 1시간도 되지 않아 지쳤다. 눈으로는 아름다웠던 풍경이 들어가면 막상 딴판이다. 바람은 차고 갯벌은 수없이 들러붙고 끈적이던 기억. 한낱 갯벌체험이었는데 물 따라 들어가면서 잡는 해루질은 얼마나 힘든 것일까.

도구를 보면 또 자질구레하게 많아서, 물 속에 들어갈 때는 한 손 괭이와 갈고리까지 등장한다. 낙지를 잡을 때도 돌을 뒤집기 위한 괭이가 있고 특수한 지형에 들어가려면 대대적인 중무장도 필요하다. 그 위에 밤중에도 불 밝히며 일하는 걸 몰랐다. 파도소리에 잠들다가 물때 맞춰 나가는 게 참 목가적일 것 같은데, 삶에도 해루질은 있었던 걸까. 고난 뒤에는 행복 그리고 다음에는 어려움이 찾아오던 것처럼.

인생도 해루질이라면 시련이 혹 수위를 넘어 위험한 지경에도 그래야 물때가 좋다고 한다. 살 동안의 어려움도 밀물로 차오르고 썰물이 지면서 소라니 멍게를 캐는 바닷가에서처럼 아기자기한 기쁨도 누릴 테니 적게 차오르면 물때가 좋지 않고 별달리 캐 낼 게 없다. 물때 좋은 날을 거머쥘 때도 갯벌은 더 많이 드러나고 밀물 때까지의 시간도 넉넉해서 많이 잡히는 대신 유념하지 않으면 물결이 한꺼번에 밀려와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기도 한다. 주의가 필요하다.

문득 계절의 후미에서 물 삐는 소리와 툭툭 아람 버는 가을의 기척. 다달이 보름께야말로 해루질 물때로서는 최고 좋은 시기가 되고 가을걷이 시즌이라 훨씬 더 풍성하다. 어둠 속의 해루질로 금빛 아침 바다가 되고 가을이 또 거둘 게 최고 많은 계절이라면 행복 또한 진흙투성이 불행의 갯벌에서 조금씩 캐내는 고통 같은 거였다. 행복의 뻘 치고는 온통 진흙이고 늪처럼 빠지겠지만 원하는 건 대부분 그런 곳에 들었다. 물때가 좋은 곳은 푹푹 빠지는 개흙이었으나 물때가 좋아서 파낼 게 많다는 소망은 작은 게 아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지금은 해루질 물때라고 생각하는 삶을 추구해 본다. 풍경까지 물씬 차오르던 한가위 어름에서……

이 정 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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