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창 바보산수

옛날 평강공주는 바보온달에게 시집 갈 때 결혼식을 어떻게 했을까? 갑자기 그것이 궁금하다.. 왕은 언제쯤 두 사람의 관계를 부부로 인정해줬을까? 전혀 걸맞지 않은 부부관계를 우리가 가끔 봐 왔지만 김기창과 박래현의 부부관계는 운보의 입장에서는 우향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 신부인 게 분명하다.

운보는 우향보다 6살 많은 33살의 노총각이었고, 게다가 가세가 기울어 너무 가난했다. 학력이라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겨우 마친 국졸이 최종학력인데다 결정적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였다. 그녀는 그에게 무얼 기대하고 결혼을 했을까?

우향은 군산 부자집 따님으로 경성사범대를 졸업하였고, 이후 교사로 2년간 근무하다 화가에 뜻을 두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녀는 그 당시 미술을 전공한 스물일곱살의 정말 손색없는 규수였다.

그것도 처녀인 우향이 운보를 찾아가서 인연을 맺었고 그녀는 부모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였다. 30여년을 운보와 함께하면서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신랑에게 언어를 비롯해 운보의 생활 모든 것을 대신 해 주며 헌신했다.

열입곱번이나 부부 합동전을 개최한 것을 보면 진실로 작품과 작가정신으로 무장된 두사람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동화백화점에서 개최한 부부전은 전시 중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작품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운보가 말을 못하는 농아여서 북한에 납북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운보 김기창은 한국 전통 양식의 산수화와 섬세한 인물화 기법을 전수 받았지만 이를 뛰어넘어 바보산수라는 독특한 화법을 창안하고 한국화의 추상화를 선도하였다. 그의 필력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힘차고 생동감이 폭발한다.

▲ 박래현 '작품 24'

또한 우향 박래현은 일본과 미국유학을 통해 판화 연구 등 독특한 구성의 추상성의 표현으로 한국여류화가의 태두가 되었다.

한편 1976년 아내와 사별한 운보는 79년부터 84년까지 청주시 북일면 형동리 운보의 집을 지어 어머니와 아내의 묘소를 옆에 두고 기리며 살았다고 한다.  2001년 사망 시까지 20여 년간 세계적인 작가로 활동하면서도 늘 우향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면 눈시울이 붉히곤 했다고 한다.

그는 미술사의 큰 족적 외에 한국 농아복지회관인 청음회관을 짓고 아들과 함께 복지회관 운영에 전력을 쏟아 30만 청각장애인들의 희망이 되기도 하였다.

이 세 훈 / 전 한국미술협회 충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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