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화재가 있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과 국보 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다. 아쉽게도 직지심체요절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단독 금고에서 긴 잠을 자고 있다. ‘직지’를 대표적인 문화재로 꼽으면서도 정작 ‘직지’가 없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이다. 살아 생전 직지심체의 실물을 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가 하루 빨리 먼 타국의 금고를 벗어나 청주 시민의 곁에 돌아오길 기대한다.

반면 용두사지 철당간은 다르다.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친근한 문화재다. 직지심체요절이 먼 나라에 이민 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친척’이라면, 철당간은 가까운 곳에 있는 유명한 ‘이웃사촌’ 같다. 대부분의 국보라고 하면 외딴 곳이나 유명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데 철당간은 쇼핑거리, 시내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철당간’은 청주사람들의 대표적인 약속장소다. 지금은 쇼핑과 소비의 중심인데 철당간이 위치한 상당구 남문로 2가 48번지는 원래 용두사라는 절의 터였다고 한다. 절은 사람이 갖고 있는 욕망과 욕심, 즉 물욕을 최대한 멀리하는 곳인데, 원래 절터였던 곳에 화려한 쇼핑거리가 조성되었고 그 중심에 철당간이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1,000년 전의 사람들이 절터 주변이 이렇게 조성될 줄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

기록에 의하면 철당간은 962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람으로 치면 무려 1100살을 먹은 셈이다. 당간은 재료에 따라 목당간, 석당간, 철당간 등으로 불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보로 지정된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은 알면서도 충남 공주 갑사 철당간은 모른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원래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었다가 지금은 20개의 철통이고 현재 높이는 12.7m라고 한다. 공주 갑사 철당간은 24개의 철통을 이어놓았다가 1893년에 4개의 철통이 부러져서 낮아졌고 높이는 약 15m이다. 두 개의 철당간 모두 크기나 지어진 시점이 비슷한데 어떤 것은 ‘국보’로 어떤 것은 ‘보물’로 지정이 되었을까? 오래 된 걸로 따지자면 공주 갑사의 철당간이 더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세 번 째 철통 겉면에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이 양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일하게 만든 연도와 국호, 제작동기가 정확하게 새겨져 있는 문화재라는 것이다.

제작된 시기에 재임한 왕은 고려의 4대 왕인 광종이다. 광종은 고려 태조인 왕건의 아들이자 500년 고령왕조의 기틀을 세운 왕으로 평가 받는다. 국사시간에도 배운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통해 왕권강화의 정책을 추진했다. 시작된 왕조의 역사가 짧은만큼 철당간 지주의 모양은 그 전 왕조인 통일신라시대의 조성양식을 띈다고 한다.

철당간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옛날 청주에는 홍수가 자주 발생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잦았다고 한다. 어떤 점술가가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돛대 구실을 하는 철당간을 세워놓자 이후로는 홍수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근데 이러한 일화가 무색할 만큼 불과 지난 16일 충북 청주는 큰 홍수피해를 겪었다. 다행히 시설 등의 경우 피해복구가 원활히 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실종, 사망 등 복구할 수 없는 인명피해도 발생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대자연의 힘 앞에 무력함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 옛날 철당간을 지으며 홍수를 막으려고 했던 백성들의 마음처럼 충북 청주가 다시는 이런 홍수피해를 겪지 않을 수 있도록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시스템이 확충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기수 / 충청북도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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