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 번개, 태풍을 동반한 폭우가 연일 되고 있다. 우렁한 몸짓이 만들어 내는 바람은 모험가의 이야기처럼 신이 난다. 몰아치는 바람은 부용, 원추리, 무궁화 아직 못다 핀 꽃들을 재촉한다.

우리 전통놀이 중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것이 있다. 술래가 돌아서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칠 때마다 나머지 사람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술래 곁으로 한 발 한 발 다가 간다. 술래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몸을 정지해야 한다. 움직이는 것이 술래의 눈에 띄는 사람은 술래의 포로가 된다. 술래의 눈을 피해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술래와 포로가 잡은 손을 치고 출발선으로 내달리는 놀이로 아이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놀이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모여 왁자하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오래된 풍경이다. 몇 십년 지층을 밣고 내려간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아스라이 고향 언덕이 망막에 와 있고, 함께 놀이를 즐기던 친구들의 이름을 호명해 보았다. 경희, 영숙, 정순, 한철, 중석, 은옥, 명희, 현숙, 봉섭. 안마당에도 바깥마당에도 무궁화나무가 있었다.

마을 어귀 강과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길게 허리띠처럼 나 있는 길에도 무궁화 나무가 있었다. 멍석처럼 또르르 말린 꽃잎 차례가 좋았고, 희석된 자줏빛 언저리를 감도는 빛깔이 좋았다. 꽃잎 끝 도톰한 부분을 반으로 갈라 귓불에도 붙이고, 오똑한 코에도 붙였다. 귀고리도 되고 닭 벼슬도 되었다.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고 단명 한다지만 마흔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희석된 자줏빛이 선명하다. 뒤틀린 나뭇가지, 빼곡하게 붙어 간지럼을 태우던 진딧물까지. 밥물처럼 흥건하던 초록이파리들.

내친김에 무궁화 동산을 다녀 왔다. 색깔도 모양도 다양한 무궁화가 앞 다투어 피어 있다.
성형미인 같다. 포즈와 표정들 제각각이다.
정서가 강한 우리 민족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과 어려움을 함께 겪은 민족의 정신이 담긴 꽃으로 무궁화를 꼽았다. 독립 운동가들은 무궁화를 민족의 표상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한 때 우리나라 전 국민이 무궁화를 통한 민족혼 고취 운동이 일기도 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면서 전국에 심겨져 있는 무궁화가 죄다 뽑히게 되었다. 일제가 무궁화 꽃가루가 눈병을 일으키고, 살에 닿으면 부스럼이 난다는 헛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이다. 또한 무궁화나무를 화장실 옆이나 돼지우리 옆에 심게 해 우리 국민 스스로 천대하는 나무로 전락하게 했다. 특히 1919년의 3. 1 만세 운동 이후부터는 전국의 학교와 관공서에서 무궁화를 뿌리째 뽑아 버렸다. 나라꽃인 무궁화를 통해 민족정신이 자라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무궁화는 서둘러 꽃을 피우는 식물들과는 달리 계절이 깊어 잎이 무성해 질 무렵, 하나 둘 꽃이 피기 시작한다. 꽃 한 송이의 수명은 단 하루. 그러나 매일 다른 꽃송이가 여름부터 가을, 흰 무명 바지저고리가 차가워 질 때까지 끊임없이 피고 지며 은근과 끈기를 과시한다.

우리 민족은 무궁화를 특별히 나라꽃이라고 지정한 바는 없다. 하지만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면서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가슴에 상징처럼 자리 잡게 되었고, 광복이 되자 정부는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정했다. 국기봉과 정부와 국회의 상징도 무궁화 꽃을 형상화하게 되었다.

요즘 무궁화는 색깔도 모양도 다양하고, 품종도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나라꽃의 기본 유형은 단조로우면서도 조용하고 순수하고 깨끗하다. 홑꽃이되 적단심, 즉 안쪽은 붉고 꽃잎의 끝 쪽 대부분은 연분홍색으로 희석된 자줏빛이 섞인 것. 이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며, 우리의 얼이기 때문이다.

신준수 / 숲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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