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으로 보는 충북의 문화재 -


불볕더위가 찾아오면서 한줌 그늘도 아쉬운 계절입니다. 수직의 도시공간에서 크고 작은 나무들은 비상구나 다름없습니다. 초록의 싱그러움과 그늘만으로도 턱 막힌 숨통을 풀어주니까요.

농경이 주였던 우리 선조들은 동네 입구마다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 역할도 했지만, 수명도 길고 우산을 펼친 것처럼 가지를 넓게 뻗으며 자라 큰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그늘에 들마루 하나 들이면 마을 사랑방이 되기도 하고, 농사철에는 농부의 쉼터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나무 한그루가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거지요.

수종은 다르지만 청주에는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인 중앙공원의 은행나무입니다. 잎이 오리발가락처럼 생겨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도 갖고 있어요. 나무는 키가 30미터, 나이는 900년 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 수명이 100세 시대로 접어들며 의학혁명이라고 떠들지만 압각수는 그보다 9배가량 오래 살고 있으니 영물이란 인간의 위세도 미약하게 느껴집니다.

오래 살았다는 것은 많은 일을 겪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언제 누가 심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청주압각수가 있는 자리는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청주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충북도청 건물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지역을 다스리던 청주목사와 충청지역 군대를 통솔하던 충청병마절도사가 근무했습니다. 또 주변에 빙 둘러 청주성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이 공간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곳임을 확인시켜준답니다. 고려시대 역시 주변에 감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압각수는 청주라는 공간의 심장에서 900년간 자란 나무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은행나무였을까요? 공자가 행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말처럼 후학을 힘쓰기 위해 심은 것인지, 아니면 은행나무 한그루 있으면 집안에 큰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인지 기록 없어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짧은 나무 지식으로 선조들의 지혜를 추측해 볼 뿐입니다.

청주의 상징으로도 손색이 없는 나무는 오랫동안 많은 청주사람들에게 위안과 쉼터가 되어주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충신 이색이 모함으로 인근 감옥에 갇혔다가 홍수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간신히 탈출해 압각수에 올라 살았다고 합니다. 충신을 살린 나무로 기록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기록에 비켜서서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을 점령한 일본군과 의병들의 전투와 청주성탈환을 지켜봤을 것이고, 19세기 중엽 천주교박해가 심해지면서 천주교도들의 죽임을,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나라 잃은 슬픔을 묵묵히 목도했을 것입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 중앙공원 일대는 한 때 청주 문인 민병산 작가의 집마당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민씨들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도 알 수 있는데요, 민 작가는 이 은행나무와 관련해 <으능나무의 편지>라는 수필 한편을 남겼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나무 아래를 앉아 있길 즐겼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나무부터 찾았다는 그의 일화에서 어머니 품 같은 압각수와 함께 기인으로 살다간 그의 심정도 어렴풋이 읽혀집니다.

900년의 누적된 나무의 세월 속에 강물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고 사라졌습니다. 모습은 달라도 수많은 이 땅의 청주사람들을 지켜봤을 나무는 이제 중앙공원에서 노인들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저만치 흐른 뒤 또 누군가의 나무가 되어주겠지만 그 시간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리들은 바람처럼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비록 움직이지 못하고 한 자리를 지키며 살았지만 오랜 세월 청주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나이테로 기억하고 있을 나무를 생각하면 숙연해집니다.

연지민 / 충청타임즈 교육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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