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인근 레스토랑에서 간세 모양으로 만든 전등갓을 보았다. 천정에도 그와 바슷하게 장식을 했다. 색동 한지로 제주 올레길의 상징인 조랑말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했는데 무척 산뜻하다. 간세는 제주도의 조랑말로, 게으름뱅이라는 제주어 ‘간세다리’에서 나왔다. 제주 올레길에는 조랑말 모습의 안내 표지판이 있고 그로써 경관을 돌아보고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최근 올레 붐이 한창이더니 그 상징인 간세까지 덩달아 유행을 타고 있다. 올레는 또 ‘큰 길에서 집 앞으로 통하는 골목길’의 제주 방언이며“올레로 나올래?”라고 하던 식이다.  제주 공무원 행정망의 별칭이기도 했던 올레. 제주 동쪽 해안에서 남서부 해안까지 올레를 이어 붙여 마을과 오름 등을 걷는 코스로 앞서 말한 모형으로 만든 간세가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다. 놀면서 쉬면서 걸으면서 가족과 이웃과 타시락대며 얽혀 있던 마음도 풀어내고 풍경까지 완상할 수 있는 바닷길 올레.

그것은 이를테면 바람막이 길이다. 바람이 불면 곳곳의 쓰레기와 그물까지 휘감아 날렸을 테지. 난장판이 되는 건 물론이고 가장집물 등도 부서졌을 테니 태풍이 지나갈 때마다 여간 고충이 아니었겠다. 의논 끝에 돌담길을 만들었을까. 제주도 바람은 워낙 유명했지 않은가. 유달리 센 특징상 골목골목 돌아가면서 담을 쌓고 보니 바람도 순해졌다.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이 있다더니 등등했던 기세가 돌담을 거쳐 오면서 한풀 꺾인다. 누구나 걷기 편하고 예쁜 돌담길, ‘착한 길’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다. 태풍이 몰아쳐도 안방 같이 편한 곳, 바람막이 올레 방풍로다.

올봄에 나도 탄금대 올레 길을 다녀왔다. 제주 올레길이 바다가 보인다면 충주 올레길은 남한강변을 끼고 도는 길이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오솔길과 신록에 반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소나무 언덕을 끼고 가면 남한강이 나오고 대나무 숲이 우거졌다. 어느 때는 강기슭 찰랑이는 억새가 보이고 아득히 날아오르던 물새. 중. 고등학교 시절 봄 가을 소풍 때마다 오던 곳인데 다시 와보니 새삼 이런 길이 있었나 싶다. 서투르나마 화폭에 담고 싶을 정도로 고즈넉한 풍경 때문에 뜬금없이 생각나는 곳.

요즈음 어딜 가나 올레길이 흔하다. 가볍게 하루 날을 잡아 다녀올 수 있고 쉬엄쉬엄 산책삼아 거닐 수 있다. 장비도 필요치 않고 가벼운 나들이차림에 길도 가파르지 않아서 두런두런 얘기 장단도 맞추며 간다. 너무 멀다 싶을 때는 쉬거나 중간에서 되짚어올 수도 있다. 동구 밖 과수원을 돌아가고 오솔길을 걷는 것처럼 혹은 조랑말이 푸른 들판을 걸어가듯 천천히 가볍게 가는 것이다. 올레 길 자체가 고샅고샅 동네 골목을 돌아가는 길이고 그래서 늘 편한 기분이다. 제주 올레 길의 길잡이 간세도 게으름뱅이에 느림보일지 몰라도 잠깐씩 쉬어가는 이미지야말로 바쁘게 사는 현대인의 활력소로 충분할 테니까.

느릿느릿 굼떠서 그렇지 가기는 간다는 의미였을까. 올레 길 역시 엉뚱한 길이 나올 때가 있어도 저만치 갈림길이 나오면서 왔던 길로 다시 접어들기도 한다. 빨리 가려고 서두르다가 길을 놓치는 케이스를 보면 특이한 경우다. 올레 길은 속히 갈 수도 없는 게 길섶의 풀꽃 발치의 돌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산새들 노래에 취하다 보면 갓길 비알마다 환히 웃는 꽃. 할 수 없지 그래 하고 두어 송이 꺾어들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바위틈 번져나간 새파란 이끼.

적어도 내 좋아하는 탄금대 올레길에서의 기억은 그랬다. 가다 보면 참나무 숲의 가랑잎이 버스럭대곤 했었지. 얼핏 청설모가 숨어 있지 않나 싶어 들여다보면 서너 걸음씩 지체지곤 했다. 제주 올레길의 간세 시늉 그대로다. 싱그러운 바람과 숲속 내음 때문에 안 그래도 뒤처지는데 산철쭉이며 이끼가 발목을 잡는다. 누구를 막론하고 서둘러 가지는 않을 올레길에서 조랑말 간세가 저만치 길을 가리키며 찬찬히 가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올레는 안단테 골목이고 간세도 그런 느낌이었으나 제주의 모두가 느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바람은 무지하게 불어대고 골목골목 지저분한 것들 역시 덩달아 회오리치다 보니 좀은 느긋해지라고 올레를 만들었다. 허구한 날 시달려 온 제주 사람들은 말투며 행동이 빨라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천천히를 강조해 온 성 싶다. 느린 만큼 빨라지듯 지름길은 대부분 오솔길에 있는 것일까. 가령 숲 속 어디쯤 질러가면 이 삼 십 리쯤은 앞지르는 길이 나올 때가 있다. 호젓한 길이라 아는 사람은 드물어도 오래 전 노루와 토끼가 동네 초입에까지 들어오던 걸 보면 있을 법하다.

자갈투성이에 울퉁불퉁 비좁아 걷기도 힘든 길이었으나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 오히려 고답적이다. 올레 길 안팎의 풍경도 사뭇 대조적이었으니까. 바람도 거기서는 일단 주춤한다. 폭풍도 사실은 제주 앞바다에서만 극성이다. 올레만 탄탄하면 어떤 바람도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나름 경지와 가치관으로 쌓은 올레길만 있으면 시련도 문제되지 않는다. 태풍에 바람에 시달려 온 제주 사람들의 올레야말로 도담도담 아늑한 공간이 되듯 우리 삶의 영역 또한 올레를 만들어두면 운명도 기세가 꺾일 테니 역경의 회오리를 피할 수 있는 안식처다.

조랑말도 체구는 작고 그 상징인 간세 또한 게으름뱅이를 뜻하지만 열흘이면 천리를 간다. 하루 천리를 가는 천리마도 대단하지만 열흘씩 걸려 천리를 가는 의지도 만만한 게 아니다. 빠르기는커녕 또각또각 박자를 맞추듯 걸었기 때문에 작정하면 천 리까지 달릴 수 있었다. 세상에 천리마가 전부일 수는 없고 지금은 또 천 리라고 해야 과히 먼 거리는 아니어도 열흘 작정하고 천리를 갈 수 있는 의지는 배우고 싶다. 늦어도 조심조심 확실하게 가는 것이다. 서둘러 갈 수도 없는 올레 길인데 거기서도 제발 천천히 가라고 손짓하는 간세다리 조랑말처럼.

수필가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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