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느(Paul Cezzanne)의 생트 빅투와르산

 

      < 1902-04 Oil on canvas( 69.8 x 89.5 cm) Philadelphia Museum >

 인류역사상 미술은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며 이어져왔다. 고전파, 자연파, 사실파, 인상파 등....
그 중에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세잔느(Paul Cezzanne, 1839-1906) 이전과 세잔느 이후로 크게 대 변화가 이뤄졌다. 미술이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언제부터인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이해가 어렵다고 하고, 현대에 와서는 차츰 무관심으로까지 변해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현상의 근간이 세잔느라고 말하기도 한다.

미술사의 큰 별로 두사람을 꼽는다면 16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19세기 후기인상파 폴 세잔느를 선택함에 의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를 근대미술의 아버지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그는 생전에 위대한 명강의를 했다거나 명저서를 남긴 적은 없다.
그의 생애 중에서 중학교 2학년 때 교내 그리기 대회에서 2등상을 받은 것이 일생의 유일한 상인 것을 보면 그의 살아서 영광은 별로였다고 봐야한다.
 

      < 붉은 조끼의 소년 1895 Oil on canvas Cezzanne >

아카데미 쉬스라는 코로(Corot 1796-1875)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잠시 그렸지만, 미술학교에 불합격하고 만다. 게다가 그 시대의 이단이었고 비난받던 그룹이었던 인상파에서 조차도 그의 그림은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그는 고향 엑스왕 프로방스로 돌아와 빅투와르산과 벗하며 혼자만의 작업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어디에서도 자기주장을 펼치거나 강의한 적조차 없었다.

그는 고향 엑스중학교 1년 선배인 에밀 졸라(Emile Zola프랑스의 대문호)의 도움으로 평생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는데.. 그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어느 유명한 평론가는 세잔느의 전시회를 신문 지면에 소개하면서 “여러분은 작가의 작품이 다소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작가에겐 나름의 개성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라피트 39번지에 가서 전시회를 본다면 이건 도저히 그냥 보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의 눈과 생각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호되게 비난했었는데, 이후 세잔느가 근대미술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작가로 위상이 높아지고 난 후엔 미술평론이란 게 오직 주례사로 전락하게 된 것도 그 사건에 기인한다.

일례로 평론가의 평론이 작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가는 라피트 39번지(세잔느가 개인전을 한 곳)를 들이대며 호통을 치게 된 것이다. “네가 뭘 알아, 나도 대단한 작가인데 평론가인 네가 작품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서 이런 평론을 내린 거야”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보자. 어디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가? 인상파작가 누구의 작품이 이만큼 대지 위에 장중하게 지어진 건물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그림이 있는가?

그가 말했다 “인상파그림은 표피적이다. 내면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자연은 겉으로 드러난 표면에 있지 않다. 자연은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있다. 색깔은 표면 위에 드러난 깊이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뿌리로부터 시작된다.” “자연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라고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 말 한마디가 현대의 조형세계 전반을 변화하게 했다. 20세기 미술의 변화의 기본공식이 되어 현대미술의 기저가 되었다. 현대건축 , 복식, 공예, 장식품 등 모든 부분에 그는 공헌하게 됐다. 등가치이론, 이동시선법 등의 궁색한 이론도 잘못 그린 그를 변명해 준 이론으로, 이 이론이 거의 현대미술을 휩쓸게 된다.
물론 20세기 대표작가라는 피카소가 있어서 가능했지만 말이다.

이세훈 전 한국미술협회 충북지회장

저작권자 © 충북도정소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