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식목일이 지나 함박꽃나무 한 그루를 이식해왔다. 잎이 채 나오기 전에 옮겨 심었으면 좋았을 걸 자라던 터를 떠나온 나무는 몸살을 하여 어느 줄기의 잎은 시들고 말라가고 있다. 이제 정녕 5월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함박나무꽃은 안 보이고 대신 담장마다 빨간 줄장미가 피어나 가슴 한 구석을 더욱 졸이게 한다, 함박나무 꽃은 5-6월에 잎이 나온 뒤 아래를 향해 핀다. 꽃자루는 길이가 5㎝ 정도로 털이 있고, 흰색을 띠는 꽆잎은 모두 여섯 장으로 볼수록 안고 싶은 순결과 겸손의 꽃이다.

벌써 30년 전 젊었을 때의 이야기다. 내가 결혼하여 새 아파트 1층을 마련했는데 새로 조성되는 앞 화단에 아버지가 신혼집 기념선물을 하셨다. 당시 강원도 영월에서 교장으로 지내시던 아버지가 학교 인근 깊은 산에 오르셨다가 이 나무를 발견하시고 잎도 넓고 보드랍지만 어여쁜 꽃이 피어 구해서 심어 주신 것이다.

아파트 화단 앵두와 감나무 사이에서 함께 자라 하얀 꽃을 피워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누가 특별히 지켜보는 이 없어도 여름이 시작되면 수줍은 얼굴로 대여섯 송이 꽃을 달았고 2008년부터는 하늘로 떠나신 아버지 대신 그 꽃을 보며 위안을 삼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가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원크기는 변함없고 여러 나무가 30년을 자라니 관리사무소에서 그랬는지 큰 기둥나무줄기를 잘라 거의 작은 가지나무로 만들어 놓았다. 이러다 덜컹 베어버리면 나의 추억과 아버지의 선물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가 온 것이다. 여러모로 궁리하다가 마침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목련 한그루가 그냥 말라 버려 빈자리가 있기에 그 함박꽃나무를 교정 화단에 옮겨심기에 이르렀다. 정성껏 물을 주고 출퇴근 시 찾아가서 위로하는데 잎이 난후 이식이 좀 늦은 탓인지 가지 몇 개는 잎이 시들어 버리기도 했다.

나는 마치 아버지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아버지 덥더라도 씩씩하게 잘 자라셔야 해요. 오늘 밤도 안녕히 주무셔요“ 하며 가지를 만져보고 퇴근하고 있다. 유례없이 비도 적고 더운 탓에 여기저기 맺었던 꽃봉오리도 말라 떨어지고 올해는 정말 꽃을 못 볼까 마음 조리는데 오라버니가 뜻밖의 선물을 셀폰으로 보내왔다. 자세히 보니 아버지가 이것저것 써내려간 두 장의 메모지 인데 아래부분에 시 한편이 담겨있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니 올 해 아버지 기일 10주기를 맞아 생전에 남겨두신 유품을 정리하다 오라버니가 발견했다한다.

봄바람이 솔솔 불면
초록 잎새 살랑살랑

가을바람 세게 불면
솔가지도 흔들흔들

서로 장단 맞추니
내 마음이 즐거워져

너희는 창 밖에서 춤추면
나는 창 안에서 노래 부르련다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이 시를 지으신 걸까?
한 20여년은 된 듯한데 막걸리 즐기시고 털털하시던 아버지가 이토록 순수한 시를 지으신 것이 믿어지지 않고 신비로울 뿐이었다. 나도 수필가로 등단하여 산문집을 내었고 이젠 시를 자주 읽고 쓰고 있는데 그 모든 근원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을 때 머리가 숙여지고 사무친 그리움에 시를 읽고 또 읽고 있다,

늘 책을 즐겨 읽으시던 아버지가 창문 달린 방 안에서 책을 읽으시다 불현 듯 봄바람에 살랑대는 초록 잎들을 보신 듯하다. 가을엔 좀 서늘한 바람이 세게 부니 솔가지가 흔들거리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고......
제목은 없지만 창밖에서 나무들이 춤을 추고, 나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다는 시적감성이 놀랍고 연마다 운율을 지닌 표현 또한 그 격이 높은 시작품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다시 찾아오셨고 올해로 탄생 620돌을 맞이한 킹 세종도 영원히 먼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한글로 애민(愛民)실천으로 우리 곁에 계시다. 내 아버지도 함박꽃나무로 매일 나와 숨 쉬고 어느 날 써낸 유작 시 한편으로 우리 8남매의 영혼과 몸의 일부로 다시 살아계실 것이다.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진정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 나의 뿌리, 나의 아버지 박문규 베드로 영원히 사랑합니다-.

박종순 / 복대초등학교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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