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운조루에 만난 청주상당산성도와 청주읍성도

만물이 움 솟는 봄입니다. 꽃은 꽃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제 몸속 들끓음에 즐거운 봄앓이를 하는 중입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픈 계절이기도 하지요.

경칩이 지나고 구례마을을 찾았습니다. 구례. 한반도 중간쯤에 살고 있는 충북인들은 일부러 찾아가야 할 만큼 먼 곳입니다. 7년 전 구례를 밟고 두 번째 방문한 것이니 심적으로도 멀긴 멀었나 봅니다.

하동읍성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린 구례는 긴 뱀의 몸체처럼 땅에 드리워진 섬진강을 따라 화개장터와 산수유마을로 이어져있었습니다.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 사이로 산수유 나뭇가지마다 노란꽃망울이 가늘게 봄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하늘 위로 팡팡 생명을 피우려는 꽃들의 시간속에서 굽이치는 섬진강 그 물길이 얼마나 정겨운지 마음까지 환해졌습니다.

구례하면 산수유축제로 유명하지만 전통한옥 운조루의 명성도 자자합니다. 아직 덜 핀 노란 세상을 마음 속으로 그리며 운조루, 구름 속에 숨어 있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운조루는 1776년(영조) 류이주라는 사람이 지은 한옥집입니다. 배산임수의 명당에 속 들어앉은 집은 빼대 있는 가문의 운치로 가득합니다.

단아하면서도 고졸한 미가 담뿍 깃든 집은 담장 밖으로 물길과 연못이 조성돼 있어 집을 지으며 들인 주인장의 정성도 느낄 수 있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 어르신이 짓고 250년 가까운 가문의 내력을 품었으니 환산이 불가능한 가치이지요. 모든 조선 선비들이 꿈꾸었던 집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가문의 품격은 광에 놓여있는 쌀통이 대신 말해줍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쌀통은 때거리 없는 사람들에게 먹을 만큼 알아서 쌀을 가져가라고 만든 사랑의 쌀통입니다. 모을 줄만 알고 쓸 줄은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이 쌀통은 진정한 노블리스오블리제입니다.

그렇게 찾은 운조루에서 정작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류씨 가문의 유물에서 발견된 청주상당산성도와 청주읍성도입니다. 류이주 손자로 충청병영 우후를 지낸 류억(1786~1852)이 제작한 이 그림지도는 <구룡사절목九龍寺節目>이란 책 속에 접혀 끼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두 지도의 발견은 구례 사람들보다 충북 사람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의 청주모습과 군사시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사시설은 국가 기밀에 속합니다. 조선시대 성은 정치공간이자 군사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지방의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성은 구조나 내부시설도 극비 중에서도 극비였습니다. 그래서 주로 지도에는 표시로 기록했는데, 상당산성도와 청주읍성도를 그림지도 형식으로 그렸으니 손금보듯 내외부 주변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상당산성도는 국내 유일의 산성 그림지도로 의미와 가치가 큰 유물입니다.
그러나 유물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류씨 가문에선 부담감이 컸던 모양입니다. 항간에는 지도를 도난당했다는 소문이 돌아 연구자들의 마음을 졸이게도 했습니다.

운조루에 보관된 두 지도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2016년 4월입니다. 구례군에서 <운조루유물전시관>을 조성하면서 류씨 가문이 보관하고 있던 유물들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것입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운조루 소장 청주 상당산성도와 청주읍성도를 드디어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찾아간 운조루유물전시장은 운조루만큼이나 단아했습니다. 주말에도 사람이 많지 않은 전시장에서 고대했던 청주상당산성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 눈에 확 들어오도록 전시된 대형 그림지도는 세밀화를 보듯 상당산성의 성벽과 성문, 치성과 암문, 연못과 관아, 마을 등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소나무와 산줄기까지, 군사지도가 아니라 화가의 손길이 막 지도 위를 떠난 한 폭의 산수화 같았습니다. 몇 백 년 역사의 숨결이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함께 실린 청주읍성도는 볼 수 없었습니다. 한 장에 앞뒤로 그려져 있어 상당산성도를 뒤집어야 볼 수 있었거든요. 상당산성도 옆에는 지도가 첨부돼 있던 류억이 쓴 <구룡사절목>도 전시돼 기록의 의미를 더해 주었습니다.

소개 자료에는 <운조루 3대 주인인 류억이 청주우후 재임시 상당산성 축조할 때 사찰 승려들을 동원하면서 만든 절목이다. 류억의 소장문서인 ‘여지도’에 상당산성 채색지도가 첨부되어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청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정갈한 서체가 인상적입니다. 상당산성을 지키며 군인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선비의 모습도 그려집니다.

청주읍성도는 끝내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우리 지역의 역사를 먼 길에서 느껴보는 것도 신선했습니다. 청주시에서 두 지도를 이본으로 제작중이라고 하니 청주에서의 전시도 곧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지역관련 유물이 타지에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보물의 가치란 조금 거리를 두고 보는 것도 흥미진진합니다. 섬진강 꽃길따라 운조루로 봄나들이를 떠나보는 것도 화사한 봄맞이 아닐까요.

연지민 / 충청타임즈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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