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의 건초를 묶는 사람들-

▲ 건초를 묶는 사람들 1850년 Oil on canvas 54×65cm

19세기 유럽 미술 사회는 격변기였다 .
고전파, 사실파, 자연파, 인상파, 신인상파, 후기인상파 등의 출현으로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그중에서 자연파에 속하는 밀레(Jean F. Millet 1814-1875)를 소개하고 싶다.

필자가 어린 시절, 어딘가 서양화가 걸려 있는 곳이면 ‘만종’이나 ‘이삭줍기’가 흔하게 있었고 밀레 말고는 서양에 화가도 그림도 없는 줄 알았었다. 왜 그렇게 온통 밀레로 도배가 되었을까?

1814년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서 태어나 셀브르에서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밀레는 23살 때 파리로 와서 들라로시(1797-1850) 아뜨리에에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초상화를 주문받는 등 장래가 보장된 작가였다. 밀레는 1841년 27살에 결혼했으나 3년 후 상처하고, 32살에 후처(카트린 르메르)와 재혼하게 된다. 이후 이 후처와 부모님사이의 갈등 때문인지, 사상적 불만 때문인지, 농촌출신으로서의 향수 때문인지 그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농촌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곳이 파리에서 80km쯤 떨어진 바르비죤(Barbizon)이고 그 곳엔 이미 코로, 룻소 등 화가 선배들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바르비죤파(자연파)가 된다. 가난한 밀레는 선배들의 도움도 많이 받게 된다. 농민의 모습을 그린 그의 그림이 인기도 없거니와 아이들이 9명이나 되니 생활이 오죽 했겠는가.

밀레를 말할 때 흔히 그의 그림의 특징을 농촌에서 풍경보다 소박한 농민의 삶을 표현한 점, 종교적 숭고함을 담고 있다는 점, 부유할 수 있는 도시 생활을 뒤로하고 가난을 스스로 택한 점을 언급한다. 그리고 ‘만종’, ‘이삭줍기’, ‘씨뿌리는 사람’, ‘양치는 소년’ 등의 그림에서 보이는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진실한 삶이 우리에게 감흥을 주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혹자는 어느 일본 기호가의 취향 때문에 일본에서 유행하니까 우리에게도 덩달아 유행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유야 무엇이든, 이제 위의 ‘건초를 묶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볼 필요가 있다. 밝게 빛나는 광선과 어두움의 극적인 대비. 렘브란트를 연상하게 되지 않는가. 밀레의 특징인 노동의 신선함을 감동적으로 전해주는 숭고함의 표현도 물론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면 앞의 여인이나 뒤편에 구부려 단을 묶는 두 남자도 확실한 윤곽을 표현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낟가리와 하늘 그리고 인물과 건초가 모두 하나가 되어 어우러진 모습이 렘브란트와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

렘브란트는 200년 전 레오날도 다빈치가 발명한 안개 속에서 윤곽선이 흐려지는 부드러움을 차용하여 17세기에 우뚝 서는 화가로 남아있고, 그 후 200년이 지나서 다른 화가에 비해 유독 밀레만이 그 안개의 기법을 적용한 그림들을 남긴다. 바로 그 부드러움을 농민의 생활상에 담아 낸 그의 표현기법이 우리를 열광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인상파를 자연을 찾아, 광선을 찾아, 자연스러움을 찾아간 이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밀레에 의해 실행된 셈이고, 모네나 르노와르의 작품 전반에 보여지는 부드러운 스푸마토(sfumato)기법은 밀레의 이 그림이 이미 이뤄낸 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그의 생을 마치는 1875년은 모네가 35살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세훈 / (전)한국미술협회 충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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