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세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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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그녀
수남은 중학교 졸업반 시절 엘리트 인생을 꿈꾸며 공장에 취업하는 대신 상업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자격증 최연소 최다 보유자’였던 그녀의 화려한 스펙들이 무용지물임을 깨닫는다.

급격한 사회변화로 인해 초등학교 저학년때부터 컴퓨터학원을 다니는 시대가 되고, 타자나 주판처럼 남다른 손놀림을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는 현실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14개나 되는 아날로그형 자격증은 그녀의 성실성과 노력의 정도를 증명해주는 쓸모없는 결과물일 뿐, 엘리트 인생을 위해서 어떤 도움도 주지못한다.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신중한 선택을 했지만, 결국 돌아와 앉게된 곳은 컴퓨터시스템이 불필요한 규모 작은 공장의 경리자리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할 가까운 미래조차도 내다보지 못했던 지도교사의 무지가 문제였나? 아니면 청각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남편 규정과의 만남이 잘못된 것인가? 수남의 인생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뒤엉킨 실타래처럼 답이 보이지 않는다.

청력에 이상이 생긴 규정은 수술이 먼저라는 수남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집’ 장만을 위해 마련한 자금을 모두 털어 수술을 받는다. 그러나 규정은 수술 부작용으로인한 이명때문에 손가락 절단사고를 당하고 하루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되고만다.

수남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얻게된 남편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하기 위해선 그가 꿈꾸던 ‘집’ 장만이 최선책이라고 확신한다. 배달, 청소, 광고 명함 날리기, 식당 주방일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9년이란 세월을 억척과 집요함으로 꿋꿋이 버텨나간다. 적어도 남편이 어렵게 장만한 새 집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식물인간이 되어버리기전까지, 집이 생기면 행복해질 수 있을거란 믿음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뜻밖에도 그녀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미납된 남편의 병원비와 대출금 이자의 압박에 숨쉴 틈도 없이 지쳐가던 수남은 집을 내놓기 위해 부동산에 들렸다가 생각지도 못한 지역 재개발 소식을 전해듣는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재개발 반대여론을 주도하는 몇몇 사람들과의 충돌과 마찰을 비껴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진행이 순조롭지 못하다.

수남은 주민들에게 서명을 받아오면 해결책이 생긴다는 재개발 담당자의 말만 믿고 두발로 뛰어다니며 서명을 받아내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결국 감금, 고문과 협박에 마음조릴 수 밖에 없는 폭력적인 현실이다. 결국 본성을 잃어버린 그녀는 재주가 남달랐던 두 손으로 재개발을 막는 방해꾼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고의적인 사건처럼 보여지는 웃지못한 해프닝들은 성실함에 대한 댓가를 묵살해버린 세상을 빈정대듯이, 시니컬하고 잔인하게 펼쳐진다.

수남이로 가득찬 세상
문득 성실한 삶이 과연 개인의 행복지수나 성공여부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궁금해진다. 혹여라도 성실성보다 순수하지 않은 교묘한 편법이나 부적절한 이익관계 형성이 성공에 가속도를 더하지는 않는지, 또 변화에 수동적이고 유연성 없는 성실함이 급변하는 사회생활 속에서 오히려 방해가 되는건 아닌지, 수남의 극대화 된 불행과 극단적인 행동의 뒷면을 쫓다보면 냉정하고 폭력적인 세상살이에 대한 씁쓸함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영화 속 삶의 현실은 다수에게 공정한 기회와 혜택이 주워지고, 모두가 행복을 보장받는다는 것이 부질없고 의미없어 보이는 부정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품위를 지키며 존엄한 삶을 살기에 세상은 각박하고 냉소적이며,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그녀에게 어느 한 순간도 관대하거나 친절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폐단으로 일그러진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수남의 시니컬한 미소와 식물인간 남편과 떠나는 신혼여행 에피소드로 마무리 짓는 엔딩장면이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는 것은, 요즘처럼 사회 안팎이 어수선하고 불신과 배신감이 팽배하며, 변화를 추구하고 싶은 더 많은 ‘수남’이가 용기를 낸 현실이 오버랩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종희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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