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보는 충북의 문화재

한껏 꽃단장하고 산문을 막 나선 여인이 있다. 붉게 입술을 바르고 홍조 띤 얼굴이다. 몸을 휘감은 붉은 옷자락은 솔바람에 차랑차랑 흩날릴 듯하다. 누구의 마중이 이리도 설렌단 말인가. 연꽃 대좌에서 금방이라도 발아래 세상으로 내려설 태세다.


옥천 평야를 한 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자태는 고혹하다. 바위의 하얀 속살 위에서 불꽃 광배를 위시하고 사뿐히 대좌를 밟고 우뚝 서 있다. 발그레한 낯빛은 수줍은 미소년처럼 보이기도 하고, 너른 들을 응시하고 선 모습에선 대지의 여신 같기도 하다.

후덕해 보이면서도 절제된 표정을 짓고 있는 바위 부처는 속인의 범접을 허락지 않는다. 높다란 암벽에 서서 감았는지 떴는지 모를 눈으로 무표정하게 대지를 바라보고 있다. 세월은 자잘한 감정까지도 풍화시켜 버린 것일까, 시선을 맞춰도 표정 없는 여인은 아무런 말이 없다.

꾹 다문 입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집스러움도 엿보인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툰 뚝뚝한 충청도 사람 같다. 강인한 얼굴에서 쉽게 읽혀지지 않는 세월의 깊이도 느껴지고, 웃음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선 지난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여인을 보는 것도 같다. 땅이 사람을 낳고 기르듯, 바람과 산, 들과 물길에 깃들어 살다간 고려 여인도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여인의 생명력은 오히려 몸짓에서 나온다. 엄지를 펴고 무언가 움켜잡은 왼손은 천 년의 잠을 깨워 비로소 살아 숨 쉬게 한다. 끝내 버리지 못한 미련처럼 너무도 인간적인 손짓 하나가 생명의 숨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붉은 입술로 옮아간 온기는 멀게만 느껴지던 부처를 가깝게 끌어당긴다. 두 발을 좌우로 벌리고 동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도식적이나 거리낌 없다. 무덤덤한 얼굴로 동 터오는 아침 해를 맞이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그래서 더 당당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시선은 옥천의 평야에 닿아있다. 뚝뚝한 사람들이 복닥대며 살아가는 삶터를 수호신이 되어 묵묵히 굽어보고 있다.

그렇게 만났던 용암사마애불을 몇 해 지나 다시 찾았다. 굽은 길을 돌고, 돌계단을 올라섰을 때 부처는 여전히 여신 같았다. 부처가 아니라. 여신이라 하자 불자들이 싫어할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굳이 분간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리라.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언덕을 올랐을 때 붉은 가사가 눈부셨다. 노을빛이 와서 박힌 듯 색채도 차분차분하면서도 은은하니 아름답다.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품새는 또 어떤가. 두 발을 벌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은 21세기 여신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천 년을 살아 숨 쉬는 힘이야 말로 신의 영역이었기에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까.

연지민 / 충청타임즈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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