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을 국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국보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최고의 국보를 꼽으라고 하면 조선왕조실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나라도 이렇게 장대한 역사를 만들고 후세에 남기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적인 문화적 가치를 지녔다 평가받는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큰 위기를 맞이한다. 실록의 분실을 염려하여 삼대사고(三大史庫), 즉 성주, 충주, 전주에 각각 보관했었는데 충주와 성주사고의 실록은 전부 소실되고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유일하게 남아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전란의 와중에도 실록을 지키고 그 실록에 적힌 역사를 통해 후대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는지를 생각하면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기 충분하다.

이 조선왕조실록에는 너무나 많은 인물이 있다. 왕도 있고 신하도 있고 백성도 있다. 그런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거론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우리 충북과도 인연이 깊은 인물로 공자, 맹자 등과 더불어 성현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송자라고도 불리우는 우암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실록 속에서 어떤 인물보다 많이 등장한다. 무려 3,000번이나 언급이 된다. 그가 미친 영향, 그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조선이라는 나라는 얼마나 뿌리 깊은 유교 국가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송시열의 삶은 앞서 말했듯 충북과도 밀접하다. 당장 우암이라는 호를 딴 청주의 우암산에서 가까운 괴산의 화양서원도 있다.

괴산은 특히 송시열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그가 은거한 곳으로 알려진 암서재, 제주도로 유배가기 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화양동에 그가 있었다고 한다. 화양구곡을 따라 가다보면 어렵지 않게 그가 바위에 새긴 글씨들을 볼 수 있다. 전국의 명산과 계곡에는 이렇게 계곡에 남긴 글이 있다. 아마도 자연 속에서 이치를 깨닫는 것이 유교문화이면서 성리학의 핵심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국의 많은 유교문화의 본거지 중 송시열이 즐겨찾은 괴산이 단연 유교문화가 꽃피운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당대 최고의 학자가 이곳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괴산의 화양구곡을 가보길 권해본다.

이기수 / 충청북도 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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