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 바다의 폭풍

[눈보라 : 바다의 폭풍] 1842 Oil on Canvas 91.5/122Cm National Gallery, London
이 힘은 뭘까? 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냥 오래 머물고, 순화된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무엇을 그린 것이지?’ 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잠시 머물러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다 삼킬 것 같은 스케일, 웅장함, 화폭 속의 역동적인 빛의 흐름..., 온전히 화판의 전체 이미지와 느낌들이 내안에 꿈틀거리게 하는 것! 이 순간 어떤 감정을 경험하시나요? 그리고 전에 이와 유사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언제인지 떠올려 보세요. 그것은 잠시 치유의 과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그림과 하나가 되고, 일치되는 감동을 꼭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명화가 주는 큰 선물중의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 1775-1851)의 말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폭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다에 홀로 떠있는 배를 그린 그림이다. ‘바다·배·폭풍·대담한 터치’ 는 말을 잃고 멈추게 한다.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윌리엄 터너는 한 어부에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자신을 배에 태우고, 갑판 돛대에 몸을 묶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굉장한 폭풍우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면서 몸으로 직접 생생하게 느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폭풍우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도 그 시대 평론가들로 부터는 전경 묘사의 정확성이 떨어져 그림이 ‘얼룩’처럼 보인다. ‘너무 예술적인 나머지 자연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당시의 예술사조에 부합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술 비평가였던 존 러스킨이 그의 그림을 극찬하면서 그의 명성은 사후에 더욱 높아졌다.

존 러스킨은 윌리엄 터너가 자연의 모방이 아닌 ‘자연의 진리’를 표현하는 훌륭한 예술가라고 주장한다. 이를 동양의 도가사상을 바탕으로 본다면 ‘외형에 얽매이지 않고 대상의 내재정신을 파악할 때 그림은 화면의 미세한 부분부터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상이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며, 창작자를 넘어 감상자에게도 정신의 이상적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할 수 있다.’라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데 러스킨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 화가로 윌리엄 터너를 꼽고, 그의 작품이 모든 사물의 이면에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자연의 정령(the spirit of nature)’을 인식하게 한다고 극찬한다.

2015년에 ‘미스터 터너’라는 제목으로 터너의 일생이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감독 마이크 리는 터너에 대해 ‘작품과 대조되는 복잡하고 선형적인 인격사이의 긴장감이 흥미로웠다.’, ‘너무 진실 되면서도 정직하지 못했던, 진리를 절대적으로 포용하면서도 자신의 자식들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정말 그럴까?

윌리엄 터너는 이발사인 아버지와 고깃집 주인의 딸인 어머니 메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정신병으로 1804년 사망했으며 누이동생도 어려서 사망했다.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그는 끝없는 정신적 갈증을 경험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던 것은 아닐까? 그는 여행지에서 만난 폭풍우 같은 자연의 체험을 열정적으로 화폭에 옮겨 놓았다. 외적으로 볼 때 그는 그렇게 죽을 때까지 독신을 고수한 방랑자였다. 그러면서 그는 색체를 통하여 사물의 형태로부터 자유로웠고 색과 감정이 갖는 관계에 대해 예민하였으며, 그림의 형태보다 색이 우선이었다.

색은 곧 감정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그가 느꼈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고, 자연이 드러낸 모습과 그는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그림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역동성을 드러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윤곽의 해체를 통해 대상의 실체에 접근이 가능하게 한 그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풍경 화가이다.

터너는 ‘돈을 아무리 많이 걸거나 혹은 부탁을 한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이 그림을 누구에게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고, 그는 유언을 통해 그의 그림들을 전시할 수 있도록 미술관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그것들을 기증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그림을 통해 자연의 일부로 살 수 있고, 치유됐고, 행복했듯이 모든 이의 치유와 행복을 바라고, 늘 함께하고픈 터너의 마음은 아닐 런지..., 이후 프랑스의 젊은 화가들에게 그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으며, 유럽 인상파 화가인 마네나 모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세훈 / (전)한국미술협회 충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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