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가을입니다. 한반도를 절절 끓게 했던 태양이 순해졌습니다. 폭염과의 단절이 반갑기도 하지만 하루 만에 돌변한 계절의 변화가 섬뜩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찾아온 9월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시원한 바람을 선사합니다. 그래서인가요, 손때 묻은 책 한권 잡아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책이지요. 계절과 상관없이 책을 읽어야 하지만 가을이 독서의 계절로 명명된 탓이기도 합니다. 그럼 잠시 책이야기를 해볼까요. 책하면 빼놓을 수 없는 도시가 충북입니다. 세계에 남아있는 금속활자로 제작된 책 중 가장 오래된 <직지>가 바로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1377년에 금속활자로 찍어낸 이 책의 역사는 600년이 넘습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숱한 외침과 내란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 유명 선사들의 말을 옮겨놓은 직지는 구도자적 깨달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중서와는 차이가 있지만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이 담겨있는 금속활자는 한국의 인쇄 역사와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문화적 관점에서 직지는 새로운 가치를 형성합니다.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독일의 구텐베르크 활자 발명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지면서 세계 인류문명의 변화를 촉발했다는 평가입니다. 비록 한국에서 지식과 정보의 보편화를 이루지 못했지만 서양에서 추진된 지식정보의 혁명을 통한 세계 변화를 <직지>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을 통한 변화의 물결은 앨빈 토플러에 의해 관측되기도 했습니다. 미래학자인 그는 1991년 펴낸 <권력이동>에서 권력의 3가지 원천을 폭력과 부, 지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전 세계적 권력투쟁에서 관건은 지식의 장악이며, 이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수단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가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과녁을 맞혔습니다.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 말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계를 잠시 뒤로 돌리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책의 역할이 얼마나 큰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온 지렛대였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21세기 사람들에게 책은 대중화되고 보편화되어 있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아무나 소유하기 힘든 물건 중 하나였습니다. 책을 대량생산할 수 없고, 가격도 비싸다보니 소수 권력계층만이 향유하였습니다.
이는 봉건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책은 지식을 점유한 이들이 오랫동안 권력을 잡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인쇄문화가 발달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소수 권력층의 지식점유는 19세기말까지 이어졌습니다. 부와 권력의 세습이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되면서 지식과 정보의 문은 아주 더디게 빗장을 풀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일제강점이란 암흑기를 거치고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책은 대중화에 성공합니다. 인쇄술이 간편해지고 속도를 얻으면서 지식은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로인해 배움에 대한 향학열은 ‘대학’ 열풍으로 이어졌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집은 가난한 집대로 ‘아들 대학보내기’로 온 가족의 미래를 걸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농가에선 소를 팔아 대학등록금을 충당할 정도로 교육열풍은 거세게 일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40여 년간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통용될 만큼 책을 통한 지식의 공유는 사회변화와 계층의 이동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책의 뿌리 깊은 지식 권력은 알파고로 인공지능시대의 서막을 알린 2016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급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책의 역할은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고 변화해 갈까요. 오랜 미래가 된 <직지>를 통해 미래를 가늠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지민 / 충청타임즈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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