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훈의 명화산책

버드나무 밑의 모네 부인

‘서양화를 소개하는 글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글쓰기를 결정하기도 전에 이미 [버드나무 밑의 모네 부인]이라는 작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시대 서양의 미술인들이 이작품울 보았다면 기절초풍을 하고 비난했을 충격적인 그림 이였으리라

내가 아는 모네는 기존 서양화의 엄격한 데생과 윤곽선을 소멸시키고, 검정색 위주의 명암법을 과감히 버리고, 엄격한 구도에 의한 정확한 투시법을 거부하며 인물이 그림에 주인이기를 거부한 새로운 회화적 표현 방식을 탄생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계의 뉴턴처럼 서양화 미술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모네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도시 르아브르(Le Havre)에서 성장하면서 17세(1858년) 부댕(Eugene, Boudin)과, 22세(1862년)때 네덜란드 수채화의 대가 용킨드(J. B. Jongkind, 1819-1891)를 만나 깊은 감동을 받으며 그들을 스승으로 존경했다. 부댕(Eugene, Boudin)은 소년 모네에게 자연의 있는 그대로가 얼마나 풍요한 아름다움에 가득 차 있는가를 가르치고, 이 자연의 직접적인 미를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묘사하는 일이 회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므로 야외에서 그림 그리기를 권유했다.

용킨드(J. B. Jongkind)는 1860년대초 그의 그림에서 빛의 변화와 대기의 아른거림이 처음으로 표현되었고 르아브르에서 만난 모네에게 인상주의에 대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모네의 초기 활동은 노르망디 해변에서 체득한 그림에 대한 생각과 파리에서 마주친 실제 관행을 통합하겠다는 결심을 하게하고, 이미 아카데믹한 수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연을 직접 그리는 기쁨을 누렸으며, 밝은 외광 속에서 자연을 관찰하는 희열을 만끽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네가 파리에서 우끼요에(浮世畵)라고 하는 일본 채색 목판화를 본 것이다. 단순한 구도와 색체, 특히 명암이 없는 일본 목판화는 당시 유럽미술과는 다른 것으로 명암이 없이 선과 강렬한 색채만으로 그려졌다. ‘아..., 이런 그림세계도 있구나!’ 모네는 아주 많이 놀란다. 모네는 여기서 ‘넓은 풍경에 작은 인물’, ‘화폭의 자유로움’-캔버스가 옆으로 현판이나 족자처럼 긴 것도 있고, ‘이렇게 그려도 돼는 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특히 이것을 놀랍게도 자기 그림에 흡수한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붓의 획, 터치를 동양에서 붓글씨에 획이 있듯이 표현했는데 오늘 소개하는 [버드나무 밑의 모네 부인]에서는 이러한 붓이 지나간 획이 그림 속에 나타나고, 넓은 풍경에 작은 인물, 이목구비가 사라진 얼굴 등 모네가 서양화에 동양미술의 세계를 접목시킨 부분들을 잘 감상해 볼 수 있다.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네의 그림에 붓이 지나가는 획이 있다는 것이다. 이 특징은 그 이전에 대담한 붓놀림이 다소 있기는 하지만 (모네를 포함한 인상주의자들은 이러한 동양미술에서 ‘시각에 대한 고대의 지배적인 지식이 잔존해 있음을 발견해 냈다.(E.H 곰브리치(1985), 전게서, p525-527)’ 고 하는데, 나는 잠시 모네가 서양화에 동양미술을 흡수하여 그리는 과정에서 이러한 동양철학의 깨달음이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모네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광선으로 가득찬 ‘대기의 아름다움’, ‘대상과 나 사이에 있는 것’ 즉 공간이었다. 모네는 ‘나는 소재(모티브)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나 사이의 공간이 내 그림의 모티브다.’라고 하며, 일본화를 보고 이를 깨달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나무, 저것은 꽃이라는 등의 선입견 없이 눈에 비친 것을 즉흥적으로 옮겨 놓는 것은 마치 불교의 연기법을 떠오르게 한다. 주변과 사물이 일체가 되는 하나 되는 느낌, 즉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은...,

그래서 일반 서양화처럼 또렷하지 않고,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은 주변이 안개처럼 뿌였게 되는데 그것을 다분히 동양의 ‘무위’라든지 ‘자연’이라든지 이런 것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모네는 작품을 통해 동양사상을 나타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무의식에 잠재된 자연과 일체된 나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이 세훈 / (전) 한국미술협의 충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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