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본 것은 따스한 봄 어느 날 오후였어. 몇 몇 친구들과 목욕봉사를 한다고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마루 끝에서 해맑게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엎드린 채 미소 짓던 그 모습.

얼마 후 갔을 때도 그렇게 웃고 있더구나. 립스틱을 바르는 중이었지 아마? 그 날 따라 집안은 조용한 게 부모님은 외출하신 것 같았어. 약속이 된 일인데 그럴 리가 없다 싶어 창문으로 들여다보다가, 엎드린 채 립스틱을 바르고 있던 너와 마주친 거지. 한 번 앉아보지도 못하고 배밀이로 기는데 화장이라니 뜻밖이었다.
 
팔꿈치는 해어지고 고름이 흐르는데도 예뻐지고 싶은 마음은 있구나 싶어서 더 착잡했다. 화장이랄 것도 없이 립스틱 하나 바른 것뿐인데 그렇게나마 행복을 느낄 것 같아 눈시울이 뜨겁다.

한편 그게 남달리 밝은 너의 모습인 걸 알았어. 장애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화사한 표정 때문이었지. 언젠가는 또 두꺼운 책을 보고 있는 것에 놀라기도 했거든. 세살 때 뇌막염을 앓는 바람에 학교도 가지 못했다니 필연 부모님을 통해서 깨우치고 배웠을 테지만 노력이 아니면 이루지 못한 결과였어. 게다가 단순한 잡지가 아닌 세계명작이었으니 놀라운 일일 수밖에.

하기야 너의 집 분위기도 장애인이 있는 집 같지 않게 밝고 명랑했었다. 그런 집안이 뭐 다르랴만 딸이라 해도 일일이 시중드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을 거야. 화장실에 갈 경우 배밀이로 간다 해도 그 다음부터는 시중을 들어야 핱 텐데 짜증스러운 기색 없이 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어. 그래 몸이 불편한 너도 그처럼 밝고 명랑하게 클 수 있었다고 봐.

무엇보다 너 자신이 아주 긍정적이었어. 물을 받아 목욕준비를 할 동안 배밀이로 기어오면서도 방글방글 웃고 있던 너. 누구든 마흔 살 가까이 그렇게 살다 보면 찌들법한데 한 번 걸어본 적도 없이 배밀이로 기어 다닌 것 치고는 참 부드러운 인상이었지. 속으로야 신세 한탄이 나오고 허구한 날 눈물바람이었겠지만 힘들게 사는 부모님 때문에 나름 밝게 살자니 그 심정 오죽했을까. 아무리 배려를 하고 돌본다 해도 불평과 비관을 일삼는다면 서로가 힘들 텐데 절망을 행복으로 이끌어내는 것도 삶의 지혜라고 생각했을까.

목욕을 끝내면 천연 딴 사람으로 바뀌곤 했었지. 뽀얀 피부와 또렷한 눈이 장애인만 아니라면, 더불어 배밀이로 무릎과 팔꿈치가 해어진 것만 아니라면 구김살 없이 밝은 얼굴일 텐데 그게 오히려 안쓰러웠어. 저렇게 밝고 명랑한 아가씨가 몸만 멀쩡하면 얼마나 예쁜 딸이 되었을지 상상할 때는 나도 모르게 울적해지곤 했단다.

뇌막염을 앓은 이후로 성장이 멈추었다는 말은 들었어. 얼굴은 앳되고 싹싹해 보이지만 머리는 크고 몸은 어린애처럼 자그마해서, 애도 어른도 아닌 채 살아왔으니 참 불편했을 거야. 부모님이라 해도 일일이 의지하는 게 민망했겠지만 딸은 엄마를 의지하고 엄마는 딸을 위해 살 동안 정은 더 깊어졌을 것이다.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렇게 태어나는지 의혹스러워질 때도 있었으나 생각하니 우리로 하여금 세상 불평을 하지 말라는 섭리 때문이었어. 어떤 경우든 저렇게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행복으로 여기라는 뜻이었다니 옷깃을 여밀 수밖에.

가끔 너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뚜렷이 장애가 없는 우리도 그렇게 살기는 어렵거든. 공연한 일로 짜증 부릴 때도 너의 해맑은 얼굴이 스쳐가곤 했지. 태어나서 스스로는 마당의 흙도 밟지 못했을 테니 나야 솔직히 무엇 하나 탓할 게 없는 거지. 너를 만나고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나 할까. 세상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밝고 아름다운데 더럽고 지저분한 것만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던 자신을 생각했단다.

앞으로도 지금같이 살기를 기원할게. 겉으로는 밝아도 남모를 걱정이 왜 없을까마는 누구를 막론하고 번민과 고통 속에서 인격이 자라고 숙성된다고 생각해. 멀쩡히 잘 태어나서는 환경을 탓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주변사람을 괴롭히는 걸 보면 네가 늘 다르게 느껴졌었지. 부자유스럽기는 해도 지금처럼만 살면 어떤 장애든 문제될 게 없다는 것과 불편도 길들여지면 오히려 삶의 활력이 된다는 걸 알았어. 불편한 것은 참고 견디면 되지만 더 심한 장애는 비뚤어진 마음이었으니까.

나는 그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어떤 경우든 꿋꿋이 살면 나름 행복한 삶이 된다고. 꿈은 언제나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니까. 지금도 처음 본 그 때처럼 밝고 명랑하게 살고 있을 너를 생각하면 소중한 지침이었지. 가장 큰 장애는 외부적 여건이 아닌 스스로 포기하고 무너지는 정신적 결함이었다고. 온전한 사람으로서도 흉내 낼 수 없이 밝고 명랑한 너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어. 나 역시 꿈을 잃지 않고 세상을 비추는 작은 등불로 남기를 구도해 본다. 꽃 피는 사월 끝자락에서……

이정희 / 수필가

저작권자 © 충북도정소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