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순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윤기 없이 까슬까슬 서걱대는 것들뿐이라고 생각하는 겨울에, 마른 뿌리에서 돋아 난 새 잎이 사금파리처럼 빛난다. 처음 죄지은 사람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봉긋하게 엎드린 망초잎, 그 잎을 어루만진다. 아예 뿌리째 뽑아 들었다. 잎의 거리만큼 뿌리도 직립이다.

어린 시절 망초는 차고 넘치는 양식이고 놀잇감이고 도구였다. 어린 순은 데쳐서 된장, 고추장 참기름, 들기름 넣고 조물조물 주물러 내면 밥숟가락이 소쿠리만큼 커졌다. 더러는 아버지가 과음으로 속앓이를 할 때 어머니는 된장을 풀고 망초잎을 넣고 국을 끓였다. 후루룩 후루룩 한 대접 거뜬히 비운 아버지는 쟁기와 소고삐를 잡고 종일 씨앗밭을 갈아 엎었다.

봄에 얹혀 있는 이야기들, 봄바람 빠지면 억세질 것들이다. 파릇파릇한 것들 키를 높이고, 바람과 햇볕 사이에서 풀빛도 짙어지고 망초잎이 억세졌다. 이쯤이면 할머니는 망초잎과 개망초 잎을 가려 개망초 잎만 뚝뚝 길게 잘라 가마솥에 한 소큼 데쳐냈다. 발위에 얇게 펴 널었던 망초잎이 꼬들꼬들 말라 비틀어지면 갈무리를 했다. 말라 비틀어진 것들은 겨울 내내 양식이 되었다.

어릴 적 소꿉놀이 할 때 서방님 밥상에 정성들여 계란프라이로 올렸던 계란꽃. 오뉴월 사방이 계란꽃이다. 때때로 구내염으로 입안에서 악취가 나거나 치통이 도지면 할머니는 망초잎 다린 물을 내미셨다. 미덥지 않은 요법, 그걸 꼭 믿은 건 아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가글가글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하곤 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고, 계란꽃 환한 들판을 한참이나 뛰어다니다 잠에서 깨어났다. 하루가 뭉텅 잘려나갔지만 풍경이 도망가지 않아서 좋았다.

고라데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은 여름 내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한 철 목욕탕이다. 하지만 찬바람이 건들대면서 강물도 마른 풀벌레처럼 휭하다. 물에 들어 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다음해 여름까지 제대로 된 목욕을 할 수 없으니 온 몸이 근질거리고 부스럼도 많았다. 몸에서 갈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나기도 했고, 덤불처럼 서걱거리기도 했다. 화장품이 귀하던 시절이다.

이맘쯤 할머니는 언 땅을 파고 망초 뿌리를 캐냈다. 절구에 찧어 삼베 보자기에 넣고 비틀면 초록색 즙이 줄줄 흘러 내렸다. 커다란 병에 넣어 며칠 사랑방 윗목에 놓아두면 이물질은 가라않고 윗물이 맑았다. 윗물을 주르륵 따라 대접에 담아 아주까리기름을 몇 방울 떨꿨다. 할머니는 6남매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한명씩 옷을 벗기고 그 맑은 물을 온 몸에 마사지 하듯 발라 주셨다. 시원, 상큼한 향이 좋았지만 입술을 달싹여 자꾸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차거, 아! 차거. 차례를 기다리거나, 이미 차례를 끝낸 형제들은 홀라당 벗은 모습과 달싹이는 입술에 웃음이 나기도 배를 움켜잡고 대굴대굴 굴러가며 웃어댔다. 간지럽다고 몸을 비틀면 할머니는 손바닥으로 등짝을 내리쳐 정신이 번쩍들거나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다. 푸석하던 살결이 솜털처럼 보드라웠고, 스물스물 가렵던 몸도 개운하다. 망초 즙을 한 번, 두 번, 세 번 쯤 바를 무렵이면 두꺼운 엄동도 어느 새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하다.

어찌 바람이 이렇게 달다냐? 봄이다.

신준수 / 숲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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