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런 그녀, 나의 메리언...

늙는다는 건, 무엇보다 가혹하고 혹독한 질병이란 의견에 진심으로 공감한다. 그것도 모자라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암환자로 잠자리에 들기 전 어쩌면 오늘 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오싹한 슬픔까지 느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더 치명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메리언 그녀에게서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고령의 나이에 항암치료 받느라 이제 겨우 자라기 시작해 다듬을 새 없었던 머리털도 허망하고, 에너지와 기능을 모두 잃어버려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거동조차 불편한 신체도 부질없어 보이지만, 그녀는 지금 행복하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합창단 활동 덕분에 그녀의 하루는 즐거운 노랫소리로 가득 차고 열정이 넘치며 긍정적인 감성이 충만하다.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는 최후의 통보를 담당의사로부터 전해 듣는 순간에도 메리언은 삶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너그러운 태도로 일관하며 열과 성을 다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나간다.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만이라도 허락된다면 침대에 누워 인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은 그녀다. 노래연습은 그만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길 간절히 바라는 남편과의 갈등,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조차도 곧 있을 합창단 오디션을 향한 그녀의 희망과 열정을 삼켜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함께 준비했던 노래가 합창대회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을 기다리며 한창 연습중인데, 그녀는 자리에 없다.

아내가 죽었다...

아서는 부인에 대한 심적 의존도가 최고치였던 남자였다. 준비된 이별이었지만, 메리언만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던 그에게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의 여파는 존재의 의미까지 뒤흔들어 놓는다.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는 성격, 턱없이 부족하고 어설픈 표현력과 늘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는 태도나 표정,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이 서툴고 사교성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에게 아내의 부재가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중재인을 잃은 관계 속에서 아들과의 갈등은 점점 악화되고, 외부세계와의 교류를 완벽히 차단한 채 고독감과 공허감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아내의 체취가 남아있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도 쉽지 않고, 장보러가는 길에 아내의 무덤 앞에서 넋 나간 듯 혼잣말이라도 해야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아내를 위해 함께 방문하곤 했던 합창단 연습실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아내의 흔적을 살피고 그리움을 달래고자 하는 아서의 모습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면의 행복을 가꾸며 그 속에서 자신을 다스려나가던 메리언의 절제된 감정이 담긴 표정을 떠오르게 해 울컥 뒤엉킨 슬픔을 토해내게 만든다.

남겨진 사랑의 기적...

연습실 담벼락은 어느새 아서에게 위로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창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서라도 허전함과 슬픔을 잠재우고 싶었던 그는 마음 붙일 곳 없어 연습실을 맴돌다 용기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한평생을 자기방식대로 살아온 노년의 남자가 삶을 마주하는 태도를 바꿔나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안정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기적과 같은 모습은 시종일관 감동어린 미소를 머금게 한다. 메리언의 정성과 간절함의 에너지가 이끌 듯이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함부로 말을 던지고, 적대적인 태도가 생활화된 석고상 같은 그가 닫힌 마음을 열고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하며, 용기 내어 아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무엇보다도 본선 무대에서 아내를 대신해 노래를 부르는 아서의 모습은 가슴 뭉클한 사랑의 이미지로 오랫동안 기억될 듯하다.

이쯤 되면 우리는 메리언의 간절한 바램이 무엇이었는지, 그녀가 남기고 간 기적이 어떤 것인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메리언에게 삶의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유일한 통로이자 외부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내면의 창구 역할을 하던 노래가 결국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소중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아서에게 생활의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 주고, 삶에 대한 위로이자 진정한 사랑의 울림으로 전달될 것이란 것을 메리언은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종희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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