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아 충북 청주는 물론 전국 곳곳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된다고 한다. 해방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소녀상이 주는 의미는 마냥 애틋하기만 하다. 아침마다 앞마당에서 바람결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는 이옥선 할머니(88, 충북 보은)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누가 우리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어요.” 한 맺힌 할머니의 외마디 같은 푸념이 8월 한여름 녹음보다도 더 짙게 들리는 것은, 일제강점기 36년이 너무 송구스럽고 지난 70년 동안 집회를 하고 소녀상을 세우는 일 외엔 할머니들을 위해서 해 드린 일이 없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 때문이다.

위안부,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치욕
“16살 때였어. 차에 태워 끌고 간 곳이 중국이야. 차에서 내려 보니 군인들이 엄청 많아. 왜 이런 데로 끌고 왔냐고 따졌던 스무 살 넘는 형님은 그 놈들한테 끌려가선 다신 안 와. 죽인거지.”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이옥선 할머니. 내년이면 흔히 말하는 집나이로 90세다.
“그런 건 말하기도 그래….”
말로 어찌 다 설명할 수 있냐며 고개를 내저으신다.
“그 놈들이 생사람을 많이 죽였어. 일본 놈들이 물러가니 이번엔 소련 놈들이 나타나서 총을 마구 쏴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할머니의 가쁜 숨과 체념어린 눈빛에 듣는 사람 가슴이 먹먹해진다.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의 성욕처리 도구가 되었던 수많은 조선의 딸들. 정조를 귀히 여겼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위안부는 치욕을 넘어서 인권유린이었다. 그들에게 행해진 차마 입에 담기 힘든 가증스럽고 섬뜩한 일들은 전 세계 어느 역사를 뒤져봐도 찾아보기 힘든 끔찍한 사건이었다.
갈기갈기 찢겨진 그들의 몸과 마음은 지금도 한 맺힌 상처로 남아있다. 해방 후 마치 죄인인양 고향 땅 조차 밟지 못하는 뼛속 깊은 한을 누가 알랴.

이옥순 할머니도 중국 만주로 끌려가 2년 동안 있다가 해방 후 갖은 고생 끝에 고향인 대구에 내려왔지만 할머니에게 돌아 온 것은 반가움도 기쁨도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서 끌려간 처녀 중에 나 혼자만 살아 돌아왔거든. 아버지 친구들이 매일 우리 집에 찾아와 자기 딸은 왜 못 왔냐고 자꾸 물어.”

상상할 수도 없는 모진 고통에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인데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까지 더 이상 고향에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찾고 찾아 온 곳이 바로 충북 보은 속리산이었다. 19살 혈혈단신 처녀가 연고도 없이 타향에 살 수밖에 없는 말 못할 사연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대목이다.

올해로 광복 70주년. 해방된 지 70년이 됐지만 우리의 꽃 같은 처녀들을 끌고 가 몹쓸 짓을 한 일본은 아직까지 진정어린 사과 한마디가 없다. 오히려 법적인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도 끔찍한 기억과 후유증에 시달리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의 분통이 터지는 이유다.

사라져가는 할머니들 대신 소녀상이…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는 238명. 그러나 실제 피해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군은 전쟁에서 지자 위안부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위안부들을 한데 모아 죽이기까지 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돌아오거나 개별적으로 힘겹게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포기하고 외국 땅에 남기도 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았다. 가족 앞에도 떳떳이 나서기 어려웠던 이들은 가족과 이웃을 피해 숨어 지내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지난 70년 동안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일본이 입장을 고수하는 동안 이옥선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집회와 소송을 하는 등 피해 사실을 알리며 일본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망언’ 뿐이었다.

그나마 등록된 238명의 할머니 중 현재 살아계신 할머니는 48명. 지난 달 돌아가신 최금선 할머니까지 올해만 7명의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생존자 할머니들도 대부분 80~90대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광복절을 맞아 청주는 물론 전국 곳곳에서,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다는 소식은 반갑지만, 대신 점점 사라져가는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한다.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그 놈들이 생사람을 얼마나 죽였는데…. 돈도 필요 없어. 그 놈들도 똑같이 당해봐야 알지.”
나눔의 집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질 때마다 가슴 먹먹한 이옥선 할머니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절규처럼 들린다. 후유증(불임)으로 자식도 없고,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에게 보상금보다 필요한 것은 진심을 다한 사죄일 것이다.

“나라가, 나라가 강해야 해요.”
거동이 힘들기 전까지만 해도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에도 가고 집회도 참석하며 활동을 벌여왔지만 지금은 아픈 무릎 때문에 집안에서도 움직이기가 힘들다. 수십 년 동안 매일 집 앞에 매달던 태극기도 운신이 힘들어 이웃의 힘을 빌리시는 처지가 됐다.

그래도 나라 걱정과 조국의 젊은이들을 향한 애착은 여전하신 할머니. 어렵게 생활하시면서도 기초생활수급금과 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전지원금 등을 꼬박꼬박 모아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장학금으로 쾌척해 국민추천 국민포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라가 없어서 우리가 그 고생을 했잖아. 그러니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해.”
동이 트기도 전 눈뜨자마자 부국강병을 위해 기도하는 할머니의 심정은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어 온갖 고초를 당한 소녀의 한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아무리 화려하고 값진 젊음이라도 나라가 없다면 고통뿐인 것을 요즘 젊은이들은 알까.

돌아오는 광복절에 할머니 고향인 대구에 위안부 역사관이 개관한단다. 소녀상이 곳곳에 세워지고, 위안부 역사관이 생기는 것처럼 이옥선 할머니의 한이 풀리는 날도 빨리 왔으면 한다. 남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기 전에 말이다.

정예훈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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