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닮은 그녀...

누구나 여름이란 계절이 남긴 추억 하나쯤은 가슴속에 묻고 살아간다. 슬픈 흔적이건 행복한 기억이건 간에 그것은 또 다른 여름을 맞이할 때마다 해묵은 메아리가 되어 과거의 시공간 속에 갇혀 있던 여흔들을 일깨운다.

평생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윤석영 교수를 교양 특집프로그램 주인공으로 섭외하러 온 담당자가 던진 질문은,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차마 잊을 수 없는 한 여인을 떠올리며 그해 여름을 상기하게 만든다.

정인은 흰 블라우스에 A라인 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순박한 마을도서관 사서였다. 밝고 명랑한 성격, 수줍음을 머금은 환한 미소, 오염되지 않은 시골 공기처럼 그녀를 감도는 상쾌한 분위기는 완벽하게 준비된 한여름의 경쾌함과 닮았다. 월북한 아버지덕분에 빨갱이의 자식이란 불명예스런 낙인이 찍혀 이웃어르신들에게 배척당하면서 고아나 다름없는 외톨이 생활을 하지만, 씩씩한 태도는 언제 봐도 변함이 없다. 그녀의 얼굴엔 원망도 적의도 보이지 않는다. 대학생 농촌 봉사활동 팀에 묻어 시골에 내려오게 된 석영은 우연히 만난 그녀의 순수함과 청순함에 이끌려 주위를 맴돌다 사랑에 빠진다. 얼마 후,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에 농활 팀은 학교로 다급히 돌아가게 되고,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두 사람 역시 함께 마을을 떠난다.

그녀를 모릅니다...

삼선개헌 반대 시위가 벌어지던 날, 석영과 정인은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과 전경들이 뒤엉킨 캠퍼스 한복판에서 무력에 의해 체포된다. 석영의 가방 안에서 총학생회 선언문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월북한 아버지를 둔 정인의 손에 들려있었던 것이 심각한 사건이 되고 만다. 단순히 데모에 가담한 학생에 대한 처벌을 넘어서 자칫 잘못하면 석영을 비롯한 친구들 모두가 빨갱이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녀를 정말 모릅니다...석영은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취조실에서 두려움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녀를 부정한다. 차마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그녀를 위한 것인지 내가 살기 위한 것인지 억압적인 상황과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평생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녀의 손을 놓아버린다. 그녀와 나누었던 이야기들,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들이 한순간 가치 없고 보잘 것 없는 허상처럼 변질되고, 서로에 대한 믿음 또한 조각나버린 의미 없는 감정으로 퇴색되어버린다.

그해 여름, 시대적인 비극의 계절...

기억과 망각은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석영은 노년의 나이가 다 되도록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어두운 기억을 움켜쥐고 살아간다. 인생의 겨울 중턱에 걸터앉은 노년의 교수에게 젊은 청춘이 담긴 그해 여름은,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자 가장 비참했던 비극의 계절로 남는다.

석영은 스스로 자취를 감춰버린 정인의 흔적이 결국 편백나무 잎의 숨은 암호를 통해 전달되던 순간, 1년 내내 늘 푸른 편백나무의 잎처럼, 그녀가 한평생 그해 여름의 기억 속에서 행복해 하며 변함없는 사랑을 지켜왔음을 느낀다. 슬픔의 흔적은 행복한 기억으로 치유될 수 있다. 시대적인 환경이 몰고 온 비극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녀의 흔적 속엔 원망도 적의도 남아있지 않았다. 빨갱이란 낙인이 찍혔을 때도 해밝게 웃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잘 있어요...걱정하지 말아요...나 행복해요...

이종희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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